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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임성준(14) 학생이 18일 오후 하교 뒤 엄마와 함께 재활센터로 향하고 있다. 용인/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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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예용 소장이 런던에서 보내온 편지
2011년 8월 가습기살균제 사건이 터진 때부터 피해자 가족과 연대하며 진실을 밝히기 위해 싸워 온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이 5일 새벽 <한겨레>에 편지를 보내왔다. 최 소장은 전날 가습기 살균제 가해기업 옥시레킷벤키저의 본사가 있는 영국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이 편지를 썼다. 그는 가습기살균제로 아들 승준이를 잃은 김덕종씨 등과 함께 5일 레킷벤키저 주총장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이 회사의 부도덕함을 고발한 뒤 덴마크로 날아가 14명의 피해자를 낳은 세퓨 쪽 원료공급회사 케톡스를 항의방문 하는 등 일정을 마치고 오는 11일 귀국 할 계획이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초기인 2011년 정부가 동물실험결과를 발표하는 기자회견 자리에서 대책 마련을 호소하며 울부짖은 피해자가 있습니다. 그는 세퓨라는 제품을 사용하다 하나뿐인 아이를 잃은 아빠였습니다. 아이를 잃은 상황은 부부를 갈라서게 만들었습니다. 엄마는 경상도 친정으로 돌아갔고 아빠는 힘든 삶을 살아내고 있습니다. 2012년 10월 국정감사장에서는 가습기 살균제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저는 한 뉴스 전문 채널의 프로그램에 나가 실상을 알렸습니다. 방송을 마치고 나오는데 담당 피디가 말을 건네왔습니다. 자신도 가습기살균제로 아이를 잃었노라고 했습니다. 2009년 대한소아과학회 논문에 소개된 원인불명의 아이들 사망사례 중 하나가 자신의 아이라고…. 피해신고를 왜 하지 않느냐는 물음에 그는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아이를 잃은 뒤 이혼하고 지금은 재혼해서 아이들을 낳고 사는데 전처와 죽은 아이 이야기를 꺼내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가 한 말이 잊혀지지 않네요. “아이를 하나 둔 부부가 이런 일을 당하면 열에 아홉은 헤어집니다.” 아이를 잃은 부부가 다들 왜 헤어지는지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유도 모른 채 황망하게 아이를 보내는 과정에서 던진 말들은 비수가 돼 서로에게 꽂힙니다. 본인들의 갈등에다 양가 친척들의 개입 속에 갈등이 증폭되고 책임론이 분출하면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으며 한 가정 자체가 해체돼버립다. 저는 지금까지 수백여 건의 가습기살균제 피해사례를 접하면서 아이를 잃고 난 뒤 헤어진 이혼 사례를 수도 없이 들었습니다. <기억>이란 제목의 티브이 드라마가 떠오릅니다. 15년 전 뺑소니 교통사고로 하나뿐인 어린 아들을 잃은 태석과 지수는 헤어져 각자 다른 삶을 삽니다. 지수는 이혼 전 살던 집에서 혼자 살면서 아들을 앗아간 뺑소니범을 향한 분노로 가득한 판사입니다. 태석은 재혼해 두 아이를 두었고 잘나가는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어느날 정기 건강검진을 받은 태석에게 알츠하이머라는 병이 찾아옵니다. 물건을 잃고, 사람 이름을 잊고 자신이 찾아가던 곳이 어디였는지 잊어 거리를 헤매는 병의 진전 속에 태석은 전처의 집을 찾아가는가 하면 재혼해 얻은 중학생 아들의 이름 대신 오래 전 잃은 아들의 이름을 부릅니다. 알츠하이머는 태석에게 잃은 아들의 기억만을 남기고 다른 것들을 하나씩 지워나갑니다. 태석이 근무하는 로펌은 그쪽 계통에서 잘나가는 곳입니다. 로펌을 설립한 이는 은퇴한 법조계의 여성 거물이었고 현 대표는 검사출신인 그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태석이 알츠하이머로 하나씩 기억을 잃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15년 전의 뺑소니 사고 범인이 등장합니다. 바로 그 로펌 대표의 아들이죠. 그 아들은 할머니와 아버지의 후광속에 새내기 법조인이 됐지만 15년 전 사건의 기억을 고통스러워합니다. 할머니와 아버지는 고민하는 녀석에게 이미 소멸시효가 지났고 증거도 없으니 법적으로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며 정신 차리고 살라고 합니다. 그런데 뺑소니 사실을 알고 있는 아들의 중학교 친구가 로펌 대표 앞에 나타나 15년 전의 일을 들먹이며 돈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태석과 전처 지수는 아들 친구를 범인으로 오인하게 됩니다. 뺑소니 사건의 발생 초기부터 모든 상황을 지휘하고 통제해온 법조계의 거물인 할머니는 손자의 친구를 제거하고 손자를 해외로 유학을 보내는 것으로 상황을 정리합니다. 드라마는 태석과 전처 지수가 로펌 대표 일가가 저지른 뺑소니 사건의 은폐 과정과 청부살인을 파헤치는 결말을 향해 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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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유족인 김덕종씨가 4일 오전 인천공항 출국장에서 옥시 영국 본사에 항의하기 위해 떠나기 전 기자회견을 연 뒤 여권과 짐가방을 챙기며 힘겨운 표정을 짓고 있다. 인천공항/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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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저녁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이 서울 정동 센터 사무실에서 기자들에게 간담회를 열고 가습기살균제 사건의 시작부터 현재까지 진행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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