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멧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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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 발자국·배설물 잠자리 구덩이 5∼6곳도
올해는 유난히도 동물들이 사람을 많이 놀래켰던 것 같습니다. 지난 4월 서커스단에서 코끼리떼가 탈출하는 사건이 벌어지더니 그 다음부터는 멧돼지가 줄기차게 스캔들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5월24일 노원구 공릉동에서 나타난 데 이어 9월29일엔 한강을 헤엄쳐 건너는 ‘물개 멧돼지’가 등장했습니다. 10월19일엔 워커힐 호텔 주변, 10월24일엔 종로구 와룡동 창경궁, 10월27일엔 구리시 인창동 주택가에 출몰했습니다. 호기심과 불안이 교차된 상태에서 멧돼지를 관심있게 지켜보던 와중, 이달초엔 경북 의성 고속도로에서 멧돼지떼가 달리다가 무려 5마리가 차에 치이는 비극도 벌어졌지요. 시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멧돼지떼를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던 서울시가 지난 2~3일 대한수렵관리협회 회원들과 멧돼지 서식 현장조사를 다녀왔습니다. 저도 운좋게 조사 이틀째인 3일에 동행할 수 있었습니다. 조사지역은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아치울마을. 지도에서 보면 이 마을은 서울의 동쪽과 구리시의 서쪽 경계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아차산과 용마산 연봉이 이어지는 고개를 배경삼아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멧돼지의 이동 경로라고 추정되는 핵심 길목에 속하지요. 발정기라 수퇘지 경쟁치열 먼저 멧돼지의 흔적을 발견한 곳은 마을 텃밭. 대부분의 시금치를 수확한 빈터에 수퇘지 발자국이 선명히 찍혀 있었습니다. 수퇘지와 암퇘지 발자국은 그 모양에서 구분되는데, 수퇘지는 발톱이 갈라진 윗끝이 뭉툭하고 암퇘지는 조붓하게 각이 져 있다고 합니다. 사람 손도 남녀가 다른 것처럼 말이지요. 그런데 희한하게도 시금치밭 옆에서 고구마를 키우고 있는 동네 주민은 “멧돼지를 본 적이 한번도 없다”고 하더군요. 그 분은 “멧돼지가 만약 살고 있다면 우리 고구마가 이렇게 무사하겠냐”면서 반문하시더군요. 이 동네 멧돼지가 특히 얌전하던지 아니면 아치울마을 뒷산에 먹이가 많아서 굳이 동네로 내려올 이유가 없어서인지, 여하튼 멧돼지는 사람 눈을 피해 조용히 살고 있었던 듯 합니다.이날 조사를 함께 한 최삼섭(45·대합수렵관리협회 회원) 선생은 20년 동안 멧돼지 사냥을 해왔다고 합니다. 야생동물보호법에 따라 우리나라에선 11월1일부터 2월28일까지 제한적으로 수렵 지역을 정해 사냥 허가를 내줍니다. 최 선생은 지난해에도 사냥개를 6마리씩이나 희생시키며 멧돼지 사냥에 나서 3마리를 잡았다고 합니다. 20년 동안 멧돼지를 정열적으로 추적해온 최 선생은 멧돼지가 남겨둔 흔적을 용케도 찾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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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행성인 멧돼지는 웅덩이를 만든 뒤 들어가 낮에 잠잔다. 대한수렵관리협회 최삼섭씨가 멧돼지 잠자리를 발견해 습성을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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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을 확인하고 나서 이번엔 뒷산으로 올라갔습니다. 10분쯤 걸어가자 나무 밑에 멧돼지가 파놓은 구덩이들이 보였습니다. 최 선생은 “겨울철에 벌레가 나무밑으로 들어가자 이를 잡아 먹기 위해 코로 후빈 자국”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 전날 벌인 실태조사에선 그날 배설한 신선한 똥과 밤과 도토리를 까먹고 버린 껍질도 발견됐다고 합니다. 누구보다도 멧돼지를 ‘사랑’하는 최 선생은 이 동물을 “단순하고도 영리한 동물”이라고 표현합니다. 배부르면 아무 걱정 없이 곧바로 잠이 드는 단순명쾌한 성격의 소유자이지만, 누군가 자신을 추적하는 것을 알게 되면 뒷걸음질쳐 거짓 흔적을 만들어놓고 따돌릴 정도로 영민하다는 것입니다. 시각이 무척 약한 멧돼지는 대부분 청각과 후각에 의존해 살아갑니다. 사람이 여러명 가만히 서 있을 경우 멧돼지는 사람을 보지 못하고 냄새와 소리로 인지합니다. 그때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열심히 탐색하는 멧돼지의 모습은 정말 장관이라고 합니다. 둥그런 코가 격렬하게 움직이는 것이 마치 원판이 돌아가는 것 같고, 오른쪽 귀는 앞으로 벌리고 왼쪽 귀는 뒤로 벌려 사방의 소리를 모은다는 것입니다. 멧돼지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사람으로서, 산소 앞에 비석이 서 있으면 눈나쁜 멧돼지는 서 있는 돌이 사람인 줄 알고 무덤을 파헤치지 않는다고 하는군요. 산을 조금 더 올라가자 신갈나무 숲 사이에 멧돼지의 ‘침실’이 나타났습니다. 깊이 15cm 정도에 길이 1m 파인 구덩이가 보입니다. 야행성인 멧돼지는 햇살이 퍼지는 오전 9~10시께 잠이 듭니다. 완만한 구릉에 사방 경계가 가능한 지점을 숙박지로 잡지요. 몸이 반쯤 잠길 정도로 땅을 파낸뒤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자는데, 추운 날이면 낙엽을 긁어모아 아늑함을 도모하기도 합니다. 이 신갈나무숲엔 일주일 이상 된 잠자리부터 사나흘 지난 것까지 잠자리 흔적 대여섯곳이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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멧돼지가 벌레를 잡으려고 파헤쳐놓은 구덩이가 나무 밑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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멧돼지 발자국. 끝이 뭉툭한 것으로 보아 수퇘지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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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사람들은 멧돼지가 농작물을 망쳐 미워하면서도 자주 접하는 이 동물에게 어느 정도 친근감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노인들은 마을 뒷산을 가리키며 “저 산에 갑자년생, 내 나이만한 놈이 살어”라고 했다고 하지요. 최 선생도 하얗게 센 털을 날리는 늙은 멧돼지를 만나 그 위엄있는 모습에 압도당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이에 반해, 멧돼지를 보는 요즘 사람의 시각은 냉혹한 것이 사실입니다. 국립환경과학원 김원명 박사는 “멧돼지 수를 줄이는 것밖엔 방법이 없다”고 말합니다. 암퇘지 한 마리가 한해에 8마리씩 낳아 사고·질병·추위 등을 거치며 평균 1.5마리가 살아남는데다 암퇘지는 3년 지나면 수태할 수 있기 때문에 번식률이 매우 높다는 것이지요. 서울시도 앞으로 수락산 등에서도 조사를 계속해 멧돼지가 적정 수를 넘었다고 판단될 경우 환경부와 상의해 ‘개체수 조절’을 건의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아차산 멧돼지의 운명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구리/글·사진 <한겨레> 사회부 이유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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