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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장애인 육상의 독보적인 존재인 홍석만 선수. (한겨레 김봉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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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푸르메재단 공동캠페인 <희망의 손을 잡아요- 우뚝 선 장애인>
⑭ 세계 최고의 휠체어 스프린터 홍석만 선수
이제 출발선에 섰다. 공기의 저항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허리를 가능한 한 깊숙이 숙여 휠체어와 한 몸이 되었다. 눈을 치켜뜨고 오직 트랙만을 바라본다. 있는 힘껏 숨을 들이 마신 순간, ‘탕!’ 날카로운 출발 총성이 중국 베이징 궈자타위창(패럴림픽 주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휠체어의 세 바퀴는 나의 다리가 되고 나의 팔은 날개가 되어 시속 33km가 넘는 속도로 트랙을 가르며 나아간다. 이 순간 나는 홍석만이 아닌 한 마리의 야수가 되어 결승점만을 향해 포효하며 질주한다…….
3살 때 소아마비로 하반신 마비…‘나는 외계인인가’
1975년 제주도에서 삼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나는 3살 때 갑작스런 고열에 시달렸다. 어머니는 그 당시 내 감기증상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시고 감기약만 먹였다고 한다. 하지만 난 그 후 평생 일어서질 못했다. 척추성 소아마비로 하반신이 마비된 것이다.
현대의학의 발전으로 내가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는 기억이 일어나지 않는 한 내 평생 걸었던 시기는 걸음마를 떼었던 2년 정도에 불과하다. 난 이때 아장아장 걷는 수준을 넘어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사고를 쳐 어머니께 꾸지람도 많이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몇 장 안 되는 사진을 통해 ‘나도 걸었구나!’ 라고 확인할 뿐, 내가 걸었던 모습은 상상이 안 된다.
어린 시절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어머니 말씀으로는 나는 가지고 싶은 장난감이나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꼭 해야 직성이 풀릴 정도로 욕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 내가 항상 좁은 방에 덩그랗게 혼자 누워있어야 했고 학교에서도 한 번 자리에 앉으면 어머니가 올 때까지 꼼짝없이 앉아 생활을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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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소아마비를 앓고 난 4살 때 부모님이 장난감 말에 태워주셨다.(왼쪽) 어머니 등에 업혀 소풍을 갔던 초등학교 날.(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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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는 시간이면 반 친구들은 공을 가지고 운동장으로 달려가는데 난 그 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기만 해야 했다. 친구들은 나와 달랐다. 다른 모습이었다. 화가 났다. 나 혼자만 별나라에서 온 외계인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는가. 첫 눈에 반한 휠체어 육상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우연한 기회에 경기도 있는 한 장애어린이시설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당시 제주도에는 장애인 시설이나 특수학교가 없었다. 난 부모님께 나와 비슷한 모습의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가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더 이상 외톨이가 되고 싶지 않았다. 제주도를 떠난 적이 없었던 나는 겁 없이 혼자 비행기를 타고 경기도에 있는 재활원에 들어갔다. 숨통이 트였다. 그곳에는 장애의 모습은 조금씩 다르지만 나를 반겨주는 친구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내 운명을 바꾼 ‘휠체어 육상’과 처음 만나게 되었다. 재활원에는 전국에서 알아주는 휠체어 육상부가 있었다. 앞바퀴 한 개와 뒷바퀴 두 개의 날렵하게 생긴 경기용 휠체어를 탄 선수들은 재활원 아이들에게는 영웅이었다. 행여 고가의 경기용 휠체어에 손이라도 스쳤다가는 선생님들께 불호령이 떨어지기 때문에 나와 친구들은 멋지게 질주하는 그들의 모습을 그저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것이 휠체어 육상과의 첫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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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활원에서 만난 휠체어 육상은 젊은 홍석만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 갔다. 하지만 정식 선수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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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연습과 자기 관리, 목표를 향한 집념이 오늘의 홍석만 선수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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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내가 무엇을 하든지 “그래, 하고 싶으면 해야지” 라며 응원해주셨다. 하지만 아버지와는 사사건건 부딪혔다. 용접 일을 하셨던 아버지는 내가 회사원이 되어 평범하게 살기를 바라셨다. 아버지 생각에 운동은, 특히 장애인 운동은 생활이 안 된다고 생각하셨다. 훈련을 끝내고 지친 몸으로 집으로 돌아온 늦은 저녁 시간, 아버지와 난 매일같이 전쟁을 치렀다. “그냥 평범하게 취직해서 돈을 벌어야지 웬 운동이냐! 저놈의 휠체어를 가져다 버려야지!” “그러세요! 아버지가 버리시면 저는 또 사면되니까 마음대로 하세요!” 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가 있던가. 아버지는 언제부턴가 말씀이 없으셨다. 내가 운동하는 것을 허락하신 것이다. 마음이 놓였다. 이제 나는 목표를 향해 홀가분하게 나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꿈에 그리던 태극마크를 달았다. 국가대표 탈락과 취업 실패로 절망…“나는 왜 존재하는가?” 1999년 첫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방콕 아시안게임에 출전 해 100m, 200m, 1,500m, 5,000m에서 동메달을 땄다. 국제무대 첫 출전치고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자신이 있었다. 이번에는 비록 동메달이지만 다음 해에 열리는 시드니 패럴림픽에서는 더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곧이어 청천병력과도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내가 시드니 패럴림픽 국가대표에 탈락했다는 것이다. 패럴림픽 출전권은 대표선발 대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대회의 성적이 종합적으로 평가돼서 결정, 통보되는 방식이다. 눈앞이 캄캄했다. 회사를 그만둔 지난 4년 동안 내 삶의 중심에는 패럴림픽에 출전하겠다는 목표가 있었다. 갑자기 모든 것이 멈췄다. ‘과연 내가 운동으로 성공 할 수 있을까? 언제까지 아르바이트를 하며 운동을 해야 한단 말인가?’ 운동에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서울로 올라갔다. 취직을 하고 싶었다. 여러 곳에 이력서를 보냈지만 면접을 보자고 연락이 온 곳은 달랑 세 곳 뿐이었다. 하지만 그 조차 면접 후 합격 통지서를 보낸 곳은 한 곳도 없었다. 전문대학을 졸업하고 각 종 컴퓨터 자격증이 있었지만 장애인인 나를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곳은 한 곳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존재하는가? 대한민국에서 나는 숨을 쉬고 있지만 존재가 없는 사람 같았다. 기자들은 종종 묻는다. ‘언제가 가장 힘든 시기였는지?’. 나는 2000년 시드니 패럴림픽 국가대표에 탈락했던 이 순간이 가장 힘들었다. 그 후 2년 동안 운동을 중단했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다시 찾아 온 기회…2004년 아테네 패럴림픽 국가대표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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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선수가 2008 베이징 대회 400m에서 세운 세계신기록은 앞으로 10년은 깨지기 힘든 경이로운 기록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한겨레 김봉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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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베이징 대회 400m 결승점을 가장 먼저 통과하고 있는 홍석만 선수.(한겨레 이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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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메달이다. 2008 베이징 패럴림픽 육상 400m 경기에서 내가 가장 빨랐다. 그리고 지금껏 그 어떤 선수보다도 빨랐다. 세계신기록이다. 9만 관중의 우레와 같은 함성소리가 들렸다. 난 오른팔을 힘차게 들어 올리며 지금 이 순간, 내 존재를 전 세계에 알린다. 장내 아나운서가 내 이름을 부른다. “골드메달리스트 코리아 홍. 석. 만.” 그래 내가 바로 홍석만이다. *정리=어은경 푸르메재단 간사 (위 글은 홍석만 선수 인터뷰 내용을 토대로 재구성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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