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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4.02 15:03 수정 : 2008.04.02 15:54

지난 12일 제약회사 ‘로슈’ 앞에서 ‘로슈’가 에이즈 치료제 푸제온 공급을 거부한 것을 두고 에이즈 환자와 시민단체 회원들이 강하게 비판하며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제공. 건강세상네트워크

기존 치료제 내성 생긴 환자들 면역력 떨어져 실명까지
HIV 신약 개발 로슈, 식약청 판매 허가 받고도 팔지않아

#1. 에이즈 환자 윤가브리엘(40)씨는 2004년 생명의 고비를 맞았다. 오랜 기간 써온 인간 면역결핍 바이러스(HIV) 치료약에 내성이 생긴 것이다. 윤씨는 의사로부터 “푸제온이란 신약으로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설명을 들었다. 윤씨는 절망했다. 약을 구할 길이 없었다. 다국적 제약회사 로슈가 만드는 푸제온은 당시 식품의약품안정청의 시판 허가까지 받았지만 시중에서 구입할 수 없었다. 로슈가 “약값이 너무 싸게 책정됐다”며 한국 내 판매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는 백혈구 수치가 300/㎕에서 10/㎕까지 떨어져 의사로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치료약을 구하지 못한 윤씨는 2006년 결국 한쪽 눈을 실명했다. 두 다리에 마비 증세가 왔다. 악화일로의 상황에서 윤씨는 지난해 10월 미국의 에이즈구호단체(Aid for Aids)가 무료로 보내주는 푸제온을 공급받아 현재까지 가까스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2. 이인규(45)씨도 기존 에이즈 치료제에 내성이 생겨 면역력이 계속 떨어지고 있다. 4개월 전부터 면역 수치가 낮아지기 시작해 280/㎕까지 떨어진 상태다. 그는 푸제온이 효과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희망을 걸고는 있지만 비싼 약값에 이를 이용할 엄두를 못내고 있다. 아직 푸제온은 판매되고 있지 않아 직접 해외에서 수입하는 수 밖에 없다. 그는 “조만간 상황이 악화될 수 있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씨는 서울에이즈예방협회 응급지원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의 주위엔 그만큼이나 생명이 위독한 다른 환자들이 있다. 그는 “기존 약에 내성이 생겨 악화돼 있는 사람을 두 명 안다. 이들에게 하루 빨리 신약이 공급돼 치료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효과있는 치료제가 있지만 약을 살 수 없어 죽어가는 에이즈환자가 아프리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국내에서도 에이즈 환자들이 약을 구하지 못해 죽음에 내몰리고 있다. 약이 없어서가 아니다. 제약사가 식약청의 판매 허가를 받고도 약을 안 팔고 있어서다. “책정된 약값이 싸다”는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운 좋은 몇몇의 에이즈 환자들만이 외국 자선단체에서 보내주는 약에 의지해 생명을 이어가고 있을 따름이다. 제약사는 버티고, 정부는 뚜렷한 대책을 내놓지 않는다. 결국 환자들은 지난 12일 한국로슈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다. “환자가 먹을 수 없는 약은 더이상 약이 아니다”.


푸제온은 다국적 제약사 로슈가 개발한 HIV 신약이다. 내성이 생겨 기존 치료제가 더이상 듣지 않는 에이즈 환자들에겐 꼭 필요한 약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급여평가위원회는 지난해 9월 푸제온을 대체할 다른 HIV 치료제가 없어 ‘필수 약품으로 지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낸 바 있다. 그러나 푸제온은 환자들에게 공급되지 못했다. 2004년 5월 식약청의 판매허가를 받았으나 1병당 2만4996원으로 보험약가가 고시되면서 로슈가 공급을 거부했다. 로슈는 “약값이 너무 싸다”며 당시 푸제온 1병당 4만3235원을 요구했다. 그 후 몇 차례 복지부 약제조정위원회와 한국로슈는 약가협상을 벌였지만 진전이 없는 상태다. 2008년 1월 약가협상이 결렬된 이후 재협상 일정도 잡지 못하고 있다. 약값 책정도, 공급 여부도 제약회사에 달린 까닭이다.

시민단체는 제약사의 무리한 요구뿐 아니라 정부의 무대책을 질타하고 있다. “제약회사가 싼 약값을 들어 판매 불가방침을 세웠음에도, 정부가 이를 강제할 대책에 대해 손을 놓고 있다”는 비판이다. 권미란 HIV/AIDS 인권연대 나누리 플러스 활동가는 “선진 7개국 조정평균가를 우리나라에 고집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 특허법으로 보호받는 점을 악용해 독점가격을 제시한 폭리”라고 말했다. 제약사 요구대로라면 환자 한명을 치료하는 데 연간 2000만원이 넘는 돈을 환자와 국가가 부담해야 한다.

권씨는 “정부가 통상마찰을 우려해 필수 약제에 대한 강제실시권 행사를 안하는 것이 큰 문제”라고 말했다. 강제실시는 지적재산권자의 허락없이 강제로 특허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행위로서 세계무역기구 ‘무역관련지적재산권협정’에 규정돼 있는 합법적 권리다. 실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짐바브웨 등의 국가에선 경제상황과 에이즈의 급속한 확산 때문에 2002~05년 1차 에이즈 치료제에 대한 강제실시권을 행사한 바 있다. 지난해 초 타이도 심장질환치료제 ‘플라빅스’, 에이즈치료제 ‘칼레트라’ 등에 대해 강제실시를 행사했다.

무대책 정부 질타 목소리 높아…강제실시 행사해야
로슈쪽 “건강보험공단이 무리하게 싼 약값 요구”

시민단체는 “결국 제약사들의 무리한 약값 요구는 정부의 유약한 태도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약가협상팀의 한 관계자는 개인적 견해를 전제로 “환자들의 답답함에 공감한다. 치명적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 필요한 약은 현재 있는 제도를 활용해 해결하는 게 좋지 않겠나” 라고 밝혔다.

하지만 정부가 당장 강제실시권을 행사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이우리 특허청 산업재산지능과 사무관은 “강제실시는 국가 비상시 공익상 필요에 의한 통상실시권의 형태로 실행한다. 아주 중대한 사안이 아니면 사실상 힘들다”는 견해를 밝혔다. 이태복 전 보건복지부장관은 “환자 입장에선 급하겠지만 약의 성분·독성 등에 대한 정보가 충분치 않아 복사약을 만드는 것이 사실상 어렵다. 그보다 환자들이 희귀 약품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도록 예산을 늘려 지원하는 것이 더 현실적 대책”이라고 말했다.

기존 에이즈 치료제에 내성을 보이는 환자들은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김성순 질병관리본부 에이즈종양바이러스팀장은 “내성환자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어렵지만 환자의 에이즈 내성여부를 의뢰하는 병원 수는 조금씩 늘고 있다”고 말했다. 현애자 민주노동당 의원이 2006년 제출한 국정감사 자료에선 ‘약 120명 정도가 국내 사용되는 모든 약제들에 내성을 갖고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에 대해 변진옥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 정책위원은 “내성 환자들이 신약을 못 구하면 기존약을 그대로 먹지만 효과가 없다”며 “꼭 필요한 약은 국가가 공급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에이즈 환자의 치료를 담당하는 최강원 서울대 감염내과 의사는 제약회사들의 관용을 촉구했다. “수지가 안 맞아 판매를 안할 수도 있겠지만 제약기업은 사회적 공헌도 고려해야 한다”며 “많이 팔리는 고혈압 약 같은 것으로 돈을 벌고 시장성은 낮아도 꼭 필요한 에이즈 약은 환자에게 저렴하게 공급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그는 “실제 미국에선 제약사들이 동정적프로그램을 운영해 희귀한 약이나 비싼 약은 무료로 공급해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준영 세브란스병원 감염내과 의사는 “내성이 생긴 약의 대체제를 찾지 못해 곤란을 겪고 있는 에이즈 환자 다섯명을 치료하고 있다. 작년에 치료하던 40대 한 여성은 결국 숨졌다”며 “신약 도입을 요구하는 시민단체의 의견에 공감한다”고 말했다.

한편 로슈 쪽은 이런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약가협상이 결렬되고 있는 것은 건강보험공단이 무리하게 싼 약값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원칙적 입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현재 푸제온과 유사한 새로운 에이즈치료제 셀센트리, 아이센트리스에 대한 시판허가 심사가 진행중인데, 이 약들도 제약사가 판매허가를 받고도 ‘가격’을 이유로 판매를 거부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지난 12일 에이즈 환자들이 아픈 몸을 이끌고 다국적제약회사 앞으로 몰려간 이유와 우려가 여기에 있다.

허재현 기자 cataluni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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