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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준 연해주 고려인을 위한 의료봉사단장(서울대 치과병원 교수·맨 왼쪽)이 8월5일 연해주 우수리스크 고려인 치과병원에서 중앙아시아에서 연해주로 재이주해온 전갈리나(66) 할머니의 틀니를 끼워주고 있는 모습을, 이준길 ㈜두산 전무(오른쪽 둘째)와 김영훈 서울대 치과병원 사회복지사(맨 오른쪽)가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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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 고려인 의료봉사단 동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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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8·15가 다가오면서 “과연 우리는 일제로부터 온전히 해방된 것일까”라는 문제를 던져본다. 해방 이후 70년 가까이 지나는 동안 우리는 큰 경제적 성취를 이루고 민주주의에서도 눈에 띄는 성과를 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온전한 해방을 이룬 것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수 있다. 왜냐하면 아직도 역사라는 수레바퀴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한 ‘또다른 우리’들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자신의 의지와 달리 이국의 삶을 살고 있는 러시아 고려인과 중국 조선족이 대표적인 ‘또다른 우리’일 것이다.
8·15를 앞두고 서울대 치과병원이 중심이 돼 진행한 ‘러시아 고려인을 위한 의료봉사활동’에 동행했다. 지난 8월4~9일 연해주 우수리스크 등지에서 진행된 이번 의료봉사활동을 통해 아직도 역사의 질곡 속에 있는 ‘또다른 우리’를 살펴보고, 그를 통해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어디인지 알아보자.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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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나제스타 할머니가 내민 손에는 초콜릿이 수줍게 들려 있었다.
8월7일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 고려인문화센터에 위치한 고려인 치과병원. 할머니를 치료했던 김영수 서울치대 의사와 치료를 돕던 이지영 두산캐피탈 대리의 얼굴도 환하게 밝아졌다. 매일 20명이 넘는 고려인 환자를 이동식 간이치료의자에서 치료하는 데서 오는 피로감도 어느새 사라져버린 듯하다.
김 치과의사와 이 대리는 서울대 치과병원이 8월4~9일 진행한 러시아 고려인을 위한 의료봉사단의 일원으로 고려인 밀집 거주지역인 우수리스크와 그 북쪽 미하일롭카를 찾았다. 총 23명으로 이루어진 봉사단은 임영준 단장(서울대 치과대학 교수)을 중심으로 치과진료팀, 보철진료팀, 기공팀으로 구성됐다. 치과진료팀은 손상된 치아를 치료하거나 뽑았고, 보철진료팀과 기공팀은 힘을 합쳐 40악(악은 틀니를 세는 단위)의 틀니를 만들었다. 봉사단에는 이밖에 두산의 CSR팀 등 임직원 5명과 한국을 기반으로 하는 국제적 의료 엔지오인 ‘메디피스’ 스태프 4명이 동참했다. 최나제스타 할머니는 의료봉사단이 이번에 돌본 총 130여명의 고려인 환자 중 한명이었다.
초콜릿을 건넨 할머니는 그것으로도 자신의 마음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할지 모른다는 걱정에서인지, 또렷한 한국말로 취재진에게 물어왔다. “그러니까, 감사하는데 그냥 감사한 것이 아니라, 감사가 끝이 없다는 것을 한국말로 무엇이라고 합니까?”
고달픈 삶 ‘최씨 고집’으로 극복
최 할머니에게 김영수 치과의사의 이 치료는 단순히 이만 치료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치료해준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최 할머니는 나이가 몇 살인지 모른다. 다만 1937년 이전에 태어났다는 것만을 알 뿐이다. 1937년 스탈린에 의해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되는 과정에서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다. 그때 자신이 “아주 어렸다”고만 기억하는 최 할머니의 삶은 고달팠다. 강제이주의 목적지였던 카자흐스탄에서 할머니는 어린 시절에 거의 “빌어먹고 자랐다”고 회상한다. 그 고생 끝에 어렵사리 교사가 됐고, “한다면 하는 최씨의 고집 덕에” 카자흐스탄 최우수 교사로 선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소련이 해체되고 독립한 중앙아시아 나라들에서 민족주의 바람이 불면서 1995년 다시 우수리스크로 돌아와야 했다. 역시 많은 것을 버리고 와야 했다. 그 강제이주와 재이주의 과정에서 들었던 고려인은 기댈 곳이 없구나 하는 외로움을 의료봉사단이 조금이나마 풀어준 것이다.
할머니가 진료를 마치고 나온 복도에는 이미 한국의 여느 시골 동네에서 만날 것 같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얼굴들이 가득하다. 대부분이 최 할머니와 같이 강제이주와 재이주라는 아픔을 함께 경험한 이들이다.
서울대 치과병원 3번째 연해주 방문
“우리를 잊지 않았다” 고려인들 눈물
강제이주와 재이주로 고통받고
비싼 의료비 탓 병원 엄두도 못내며
여전히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
고통받는 그들이 있는 한
우리의 해방도 온전하지 않다
1937년에 진행된 고려인 강제이주는 연해주에 살고 있던 약 20만명의 고려인을 척박한 중앙아시아로 강제로 옮기게 한 정책이다. 2만명 이상의 고려인이 목숨을 잃었을 정도로 혹독한 이주 과정을 거친 고려인들은 그러나 1990년 소련 해체 뒤 다시 연해주로 돌아와야 했다. 이번에는 고려인들이 정착한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등에서 민족주의 바람이 불었기 때문이다. 이 민족주의 정책으로 중앙아시아 각 나라들은 민족 고유어 부흥정책을 펴 나갔다. 가령 우즈베키스탄의 경우 우즈베크 말을 못하면 공직을 유지할 수도 없었다. 이는 고려말과 러시아어만이 가능했던 고려인들에게는 또다시 큰 어려움으로 다가왔다. 많은 고려인들이 생존의 터전을 버리고 다시 우수리스크 등 연해주로 이주해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고통을 겪었기에 연해주 고려인들에 대해서는 우리 정부가 특별히 지원을 해야 한다는 지적도 많다. 한국 정부는 이미 자기의 의사에 반해서 나라를 떠난 러시아 사할린의 고려인과 중국 조선족에 대해서는 여러 입법 등을 통해 부분적으로 지원을 하고 있다. 이들에 대한 지원도 아직 부족하다는 목소리가 높은 실정이지만, 연해주 고려인들에 대한 법률적인 지원은 거의 전무한 상태다.
물론 정부가 전혀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관에 따르면, 총영사관 차원에서도 △한글교육 및 국어학과 설치 학교에 대한 정부 예산 지원 △민족 정체성 유지를 위한 전통문화 행사 지원 △고려인 동포를 위한 각종 초청사업 △고려인 정착지원을 위한 영농사업 등을 하고 있다.
고려인에 대한 체계적 의료지원책 없어
하지만 연해주 고려인들이 정작 필요성을 크게 느끼는 의료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체계적인 지원책이 없다. 다만 보건복지부 산하의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 이수구 총재 일행이 지난 3월 실태조사를 위해 연해주 현지를 방문한 것 정도가 지금까지 눈에 띄는 움직임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에서 온 의료봉사활동은 공식적 의료지원이 부족한 것들을 메우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서울대 치과병원의 경우 2009년과 2011년에 이어 세번째 연해주 고려인들을 찾고 있다. 이에 대해 김영훈 서울대 치과병원 사회복지사는 “한두번 봉사활동을 하는 것으로 연해주 고려인들의 의료상황이 개선되기 어렵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강조한다. 정부의 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그나마 일회성에 그치지 않는 봉사활동을 해야 고려인들의 의료상황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러시아가 극단적인 의료 낙후지역은 아니다. 한때는 세계 최강의 사회주의국가로서 나름대로 의료시스템이 잘 갖추어진 나라였다. 물론 소련 해체 과정에서 시스템이 크게 약화된 경험이 있다. 우수리스크 북쪽 미하일롭카에 살고 있는 곽이고르(60)씨는 15년 전쯤 마취약이 부족해서 거의 마취를 안 한 것과 마찬가지인 상태에서 이를 뽑은 적도 있다고 밝힌다.
지금은 의료시스템이 상당히 안정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낮은 연금으로 살아가는 고려인들에게는 그림의 떡인 경우가 많다. 서울대 치과병원팀과 협진을 한 고려인 치과의사 박윤순씨의 경우 “러시아에서 틀니를 해넣기 위해서는 한달 연금보다 많은 액수를 지불해야 한다”고 말한다. 생활하기에 바쁜 고려인들이 치과병원을 자주 찾을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다. 다른 질병도 마찬가지다. 우수리스크 북쪽 미하일롭카에 살고 있는 강나탈리아(58)씨는 당뇨를 앓고 있지만 병원을 찾지 못한다.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서 국가도서관 사서로 일하다 우즈베크 말을 못해 일터를 잃고 연해주를 찾은 강씨는 현재 월 7000루블의 연금으로는 월 3000루블에 이르는 당뇨약을 사는 데도 빠듯하다고 말한다. 이에 따라 강씨는 한번 가는데 2000루블 이상이 소요되는 병원은 1년에 딱 2번만 찾고 있다고 말한다.
이번 의료봉사활동을 통해 봉사단은 총 130여 고려인의 이를 치료해주고 28명에게 틀니를 맞추어주었다. 그 틀니는 오랜 기다림 끝에 얻게 된 선물이자 동포애의 상징이다. 이번에 틀니를 받은 전세르게이 할아버지는 2년 전인 2011년에 늦게 소식을 접하는 바람에 아쉽게 치료를 받지 못했다. 이에 70살이 넘은 전 할아버지는 매주 한차례씩 한국의 의료진이 언제 다시 오냐고 전화를 하는 간절함을 보인 끝에 이번에 틀니를 갖게 된 것이다. 그러니 그 틀니는 그저 이를 보호하는 틀니가 아니다. 역시 틀니를 맞춘 김유리아(73) 할머니는 그 틀니에 대해 “그것은 조국이 우리를 잊은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이라고 말했다.
“틀니는 조국이 우릴 잊지 않았다는 상징”
봉사활동은 또 고려인들만이 아니라 봉사단원들의 마음에도 ‘우리’를 다시 되돌아보게 한다. 임영준 단장은 봉사활동의 의의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능을 기부해 우리 선조들의 발자취를 돌아봄으로써, 마침내는 우리 생활을 되돌아보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임 단장은 이어 “연해주 고려인 노인들의 이를 치료해주는 것은 같은 선조를 둔 후손으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며 “이것을 통해 연해주 동포 사회도 민족과 동포에 대한 인식이 넓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러시아 연해주 고려인들이 아직 역사의 거친 굴레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못했다면, 우리에게도 아직 해방은 온전하지 못한 것 아닐까. 이번에 틀니를 신청하지 못한 한 고려인 할머니가 “다음에 봉사단이 올 때까지 살 수 있을까”라고 내쉬는 한숨이 길게만 느껴진다.
우수리스크 미하일롭카/글·사진 김보근
한겨레평화연구소장 tree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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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성 서울대 치과병원 의사가 8월7일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 고려인 치과병원에서 치료를 마친 고려인 김야콥 할아버지와 함께 밝게 웃고 있다. 서울대 치과병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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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연구기관 통한 의료 실태 파악 서둘러야
연해주 고려인 지원을 위해 우선 필요한 것은 이들의 의료실태 파악이다. 지금까지 연해주 고려인에 대해 조사를 벌인 곳은 국제 의료 엔지오 메디피스가 유일하다. 메디피스는 2011년 고려인 5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고려인들의 상당수가 만성질환에 시달리고 있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힌다. 하지만 이 조사는 조사 대상 인원이 적고, 조사 범위도 우수리스크로 한정돼 고려인 전체의 상황을 파악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현지에서 활동하는 엔지오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옛 소련의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연해주 쪽으로 재이주해온 고려인은 약 5만명 정도이다. 이 중 1만명 정도는 사할린으로 이주했고, 2만명 정도가 우수리스크에 밀집해 살아가고 있다. 좀더 늦게 연해주에 온 고려인 2만여명은 우수리스크 북쪽에 분포해 있는데, 이들이 처해 있는 의료환경은 우수리스크에 비해 훨씬 열악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사실은 이번 의료봉사활동을 통해서도 일부 확인된다. 서울대 치과병원팀은 8월6일 우수리스크 북쪽의 미하일롭카에 있는 은혜교회를 방문해 그곳 고려인들을 치료했다. 이 교회는 신도 60명 정도의 작은 교회로, 그중 45명이 고려인이다. 교회 내에 마련된 임시 진료시설에서 진료를 한 홍동환 의사는 “불과 차로 30여분을 북쪽으로 왔을 뿐인데, 치아의 상태는 우수리스크에 비해 매우 나빴다”고 전했다.
연해주 고려인의 의료상황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면 그 뒤 이들에 대한 지원방식이 어떤 것일지 결정될 수 있다. 의료분야 관계자들은 △일정한 나이 이상의 재이주 고려인들에 대한 쿠폰 발행 △봉사활동을 통한 러시아 의료진과의 협진 강화 △고려인 의사들에 대한 국내 연수 강화 등 다양한 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고 밝힌다.
이 중 쿠폰은 고려인들이 선호할 수 있는 방식이다. 미하일롭카에 사는 강나탈리아(58)씨도 “한국 정부가 의료 쿠폰을 발행하면 정말 꿈같은 얘기가 될 것”이라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하지만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관은 러시아 주민을 포함한 보편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총영사관은 “기본적으로 러시아인들은 고려인의 역할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고려인을 한-러 우호 증진을 위한 가교역할로 많은 기대감을 갖고 있다”면서도 “동포에 편중된 의료지원은 현지 시민 및 정부기관을 자극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고 밝혔다. 따라서 고려인들 밀집지역을 지원하되, 그 지역사회 전체 의료상황 개선에 도움이 되는 방향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이런 체계적인 조사를 위해서는 전문 연구기관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이에 따라 메디피스 신상문 사무총장은 단체 내부의 연구기관인 ‘지구촌보건의료연구소’를 사단법인화 등의 방식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모색중이라고 밝혔다. 이런 전문 연구소 설립을 통해 러시아 고려인의 의료실태는 물론, 조선족과 기타 해외동포의 의료실태 조사에서도 전문성과 체계성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김보근 평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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