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2.09 09:07
수정 : 2013.12.09 09:20
‘담배회사 내부 문건 속 한국인 과학자 분석’ 보고서 단독 입수
미국 담배회사 내부 문건 2042건 분석…9일 학술대회에서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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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흡연자 남편을 둔 여성이 비흡연자 남편을 둔 여성보다 폐암 사망률이 더 높았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일본의 히라야마 다케시 박사가 비흡연자 아내 540명을 14년간(1966~79) 추적한 역학조사다. 위기에 빠진 담배회사들은 과학에 과학으로 맞서는 전략을 세웠다. ‘실내공기 연구소’(CIAR)를 만들고 간접흡연(ETS·환경적 담배 연기) 프로젝트 컨설턴트를 모집했다(일명 ‘화이트 코트’·깨끗한 과학자). 화이트코트를 활용해 간접흡연의 유해성 연구에 흠집을 내기 위해서다. 담배회사와 직접적인 관련성이 없는 것처럼 보이려고 미국 워싱턴DC의 법률회사 ‘코빙턴앤드벌링’(C&B)을 앞세웠다. ETS 프로젝트는 1987년 미국에서 시작해 1988년 유럽, 1989년 아시아, 1991년 라틴아메리카로 확대됐다.
9일 서울대 호암교수회관에서 열리는 ‘비판과 대안을 위한 건강정책학회 2013년 가을 학술대회’에서 ‘한국의 화이트코트’가 공개된다.(보고서 ‘담배회사 내부 문건 속 한국인 과학자 분석’(박상표·최규진·조홍준)). 2012년 11월부터 2013년 9월까지 미국 캘리포니아 레거시 담배 문건 도서관에서 수집한 담배회사 내부문건 2042건을 분석한 결과물이다. <한겨레21>은 보고서를 단독 입수했다. 보고서가 담배회사 컨설턴트로 지목한 한국 연구자 3명은 환경·보건 분야의 최고 권위자들이었다. _편집자
1989년 2월 미국 실내공기연구소(CIAR)의 조지 레슬리 연구원과 워싱턴DC의 법률회사 ‘코빙턴앤드벌링’(C&B)의 데이비드 빌링스 변호사가 ETS 한국 컨설턴트를 모집하려고 방한했다. 첫 후보자는 노정구(당시 47살) 한국화학연구소 안전성 연구센터장(독성학 박사)였다. 레슬리 연구원과 노 박사는 2년 전 함께 일한 경험이 있었다. 노 박사가 실내공기 연구에 관심을 보였고 김윤신(당시 40살) 한양대 의대 교수(산업의학)를 소개했다. 두 달 뒤 만난 김윤신 교수는 컨설팅을 수락했다. 1일 컨설팅 비용으로 노정구 박사에게 600달러, 김윤신 교수에게 700달러를 주기로 했다. 당시 달러 환율(673.8원)로 따지면 40만원과 47만원이다. 노동자 월평균 임금(54만805원)과 맞먹는 액수였다. 조규상(사망·64살) 가톨릭 의대 교수에게도 접근했지만 거절당했다.
1989년 6월 ‘제1회 아시아 ETS 컨설턴트 방콕회의’가 열렸다. 김윤신 교수가 참석했는데 당시 담배 문건은 한국 흡연을 이렇게 평했다. “한국의 남성 흡연율은 74.2%, 여성 흡연율은 5%다. 높은 교육 수준에 비해 흡연율이 높다. 많은 의대생과 의사들도 담배를 피운다. 한국에선 간접흡연 문제에 대한 대중적 인식이 없는 상황이다.”
김윤신 교수는 1992년 3월 ‘서울의 실내공기 질 측정’과 관련한 프로젝트 제안서를 제출했다. 총연구비는 10만7100달러로 책정했다. 1993년 백성옥(당시 37살) 영남대 환경공학과 교수도 비슷한 프로젝트를 제안받는다. 석·박사 지도교수였던 로저 페리 영국 런던대 교수의 소개였다. 결국 김윤식·백성옥 교수가 서울과 대구에 있는 가정집·사무실·식당을 각각 6곳씩 모두 36곳을 선정해 실내공기의 질을 평가했다. 노정구 박사가 속한 한국화학연구소(현 미래창조과학부 산하 한국화학연구원)도 참여했다.
프로젝트는 일본실내공기연구협회(JIARS)에서 후원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실질적 후원자는 담배회사였다. 1994년 아시아 ETS 프로젝트 예산안(한국 편)을 보면, ‘백성옥·김윤신 공동연구’로 22만5천달러가 잡혀 있다. 백성옥 교수는 이 프로젝트의 연구비로 4만6천달러 규모의 분석 장비를 구입해 영남대 연구실에 들여놨다.
‘한국의 실내공기 질’ 연구는 1996·1998년 국내 학술지, 1997년 국제 학술지에 게재됐다. 담배회사 지원사업이라고 밝히지 않았다. 연구 결론은 이렇다. “흡연시 발생하는 각종 화학물질 이외에도 대기오염 유입 또는 실내 생활공간에서 발생하는 오염원의 특징에 따라 실내공기 오염이 발생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1997년 백성옥 교수는 실내공기연구소에 ‘한국인 비흡연자의 ETS 노출 측정을 위한 방법론 평가’라는 프로젝트도 신청했다. 예산은 14만6천달러.
담배회사 컨설팅은 비공개가 원칙이었다. “ETS 프로젝트는 담배회사가 후원한다. (하지만) 이들의 승낙을 받지 않고는 김윤신·백성옥 교수를 어떤 방식으로도 공개하지 않을 것이다.” 1994년 1월 김규태 한국담배협회장에게 C&B의 존 러퍼 변호사가 보낸 서한 내용이다.
한국 과학자의 연구논문을 담배회사는 ‘제3자 기술’로 활용했다. 제3자 기술은 “누군가 다른 사람의 입을 빌려서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라”는 홍보업계의 전략이다. “김윤신 교수는 ‘최근 홍콩에서 사무실·상점의 실내공기를 측정해보니 ETS 성분은 미미했다. 실질적으로 실내공기 공개 문제는 자동차 배기가스, 세정제, 기타 오염물질 및 활동 때문이었다’고 밝혔다.”(‘제3자 참고문헌’) 필립모리스의 후원으로 수행된 백성옥 교수의 연구논문도 그랬다. 필립모리스 소속 과학자는 백 교수의 논문을 근거로 간접흡연이 실내공기 오염의 주요 요인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물론 다국적 담배회사의 ‘검은 전략’을 한국 과학자들이 미리 알았다거나 동의했다고 단언할 수 없다. 설령 연구비를 지원받았더라도 말이다. 그렇다고 해도 한국 과학자를 컨설턴트로 고용하고 ‘한국의 실내공기 질’ 연구를 지원한 목적을 다국적 담배회사가 어느 정도 달성한 것만은 분명하다.
<한겨레21>은 노정구 박사와 김윤신·백성옥 교수에게 연락했다. 노정구 박사는 “레슬리 연구원에게 김윤신 교수를 소개했지만 컨설턴트 제의는 거절했다. ETS 컨설턴트 회의에 참석하지도, 컨설팅 비용을 받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김윤신 교수는 “아시아에서 거의 유일한 실내오염 연구자였기 때문에 관련 연구를 제안하는 ETS 컨설턴트 제의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고, 양심에 따라 연구를 했다”고 밝혔다. “컨설팅을 했다는 것 자체로 담배회사를 옹호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낭설이다. CIAR처럼 담배회사가 관련된 곳에서 연구비를 받아 문제가 된다고 따진다면 산학 연구라는 게 존재할 수 없다.”
백성옥 교수는 설명했다. “ETS 컨설턴트로 활동한 적은 없다. 1997년 CIAR에 프로젝트를 제안할 때 다국적 담배회사들이 공동 출자해 만든 비영리 재단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계약서에는 담배회사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등의 어떠한 상업적 요구도 없었다. 담배회사가 연구의 판단에 영향을 미칠 어떤 요구도 해오지 않았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9일 발행되는 <한겨레21> 990호 표지이야기 ‘작전명 화이트코트’에서 볼 수 있다.
<한겨레21> 정은주·김성환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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