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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6.17 11:45 수정 : 2015.06.18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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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멜바이스, 160년 전 “손씻기로 감염 막자” 주장했지만
권위적 의료계, 그의 주장을 수용하기는커녕 해고
미생물보다 상식 거부하는 귄위주의가 감염의 주범

헝가리인이던 제멜바이스는 160년전인 1846년 세계 최초로 감염을 막기 위해 의사들이 손을 ??어야 한다는 것을 최초로 주장했다. 위키미디어

메르스가 광풍인 요즘 손씻기는 상식 중에서도 상식으로 통한다. 미생물에 의한 감염을 막는 가장 기초적이며 가장 효과적인 방어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상식이 등장한 것은 불과 160년이 채 안된다. 그만큼 인류가 미생물에 무지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감염을 위해 손을 씻자는 주장은 맨처음 허튼 소리 취급을 받았고 이런 주장을 최초로 한 의사는 정신병을 얻어 정신병동에서 사망하기까지 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가장 기초적인 상식을 허튼 소리로 비틀어버리는 것은 권위주의에 따른 오만과 편견이었다.

비운의 주인공은 헝가리 출신으로 오스트리아 비인종합병원 산부인과 조교수를 했던 이그나즈 필립프 제멜바이스(1818~1865)다. 19세기 당시 도심 병원의 산부인과에 입원한 산모들의 분만 후 산욕열에 의한 사망률이 매우 높았다. 산욕열은 산모가 출산후 6주 가량의 회복 기간에 분만시 생긴 상처가 감염돼 고열이 발생하는 병이다. 지금은 이 병으로 사망하는 산모는 거의 없지만 당시 산욕열에 따른 사망률은 10~30%대로 매우 높았다. 이는 시골의 산파가 받는 전통적인 분만 과정보다 훨씬 높은 것이었다. 기록을 보면 시골 산파의 처치를 받은 산모의 사망률 4~5%로 병원보다 훨씬 낮았다. 병원보다 시골 조산원이 더 안전하다는 게 당시 의료계의 현실이었다.

손씻기는 감염을 막는 최선책이다 그러나 이 상식을 인간이 실천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무지와 오만 탓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법대를 졸업하고 의대에서 다시 공부한 제멜바이스는 2개의 분만병동 가운데 의사들이 아이들 받는 1병동의 분만실이 조산원이 아이를 받는 2병동보다 사망률이 높은데 주목했다. 1병동은 의대가 있어 2병동보다 시설이 더 크고 좋았다. 산모들에게 1병동에서의 분만은 죽음이란 소문이 돌 정도였다.

이런 현실에 의문을 가졌던 제멜바이스는 의대생의 해부 실습병동이 있는 1병동 산모들의 사망률이 의대 방학 때 감소하는 것을 확인했다. 그는 의대의 실습과 산욕열 사망자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했다. 당시 시체 보존기술이나 냉동설비가 없었기 때문에 의대의 해부 실습은 시체의 부패가 진행되기 전 재빨리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체의 부패는 막을 수 없었고 해부수업을 마친 학생들 가운데 일부는 산부인과 병동을 돌아다녔다. 당시에는 균과 감염을 연결짓는 수준까지 의학이나 미생물학이 발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제멜바이스는 둘 사이의 연관이 있다고 보고 부패의 우려가 있는 시체를 학생들이 만진 뒤 그 손으로 산모를 검진하는 것을 막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의대생들이 부인과 병동을 출입하기 전에 그들의 손을 염소용액으로 소독하는 것을 규칙으로 정했다. 1847년 그가 정한 규칙은 놀라운 효과를 거두기 시작했다. 1846년 3월 18%까지 치솟았던 1병동 산모 사망률이 1~2%대로 떨어진 것이다.

손씻기의 창안자인 제멜바이스의 업적을 유럽 각국은 우표나 동전 등으로 기리고 있다. 사진은 독일과 헝가리의 우표. 왼쪽 독일 우표를 보면 산모가 누워있는 장면이 묘사돼 있다. 위키미디어

그러나 그의 획기적인 주장은 당시 주료 의료계에서 철저히 배척됐다. 주류 의료계는 그 때까지 수많은 산욕열 사망자가 의사들이 손을 씻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제멜바이스의 지적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는 오스트리아인도 아닌 식민지인 헝가리인이었다.

결국 그는 1849년 병원에서 일자리를 잃었고 헝가리로 돌아가야 했다. 귀국 후 그는 국제 산부인과학회에 여러 차례 자신의 주장을 담은 논문을 보냈지만 돌아오는 것은 냉소였다. 이를 비관한 그는 1865년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병원에서 패혈증에 걸려 그해 사망했다.

오스트리아 의학계는 제멜바이스의 감염을 막기 위한 손씻기 관련 주장을 일축하고 그를 해고했다. 그는 헝가리로 돌아갔다가 정신병원에서 사망했다. 오스트리아 비인 한 병원에 서 있는 그의 흉상. 위키미디어

그의 주장은 30여년이 지난 1880년대 프랑스의 파스퇴르와 독일의 로베르트 코흐의 세균 감염에 대한 연구가 진전되면서 의학계에서 비로소 받아들여졌고 이후 의학계뿐 아니라 일반생활의 상식이 됐다. 많은 감염내과 의사들이 “비누와 손씻기 그리고 상식 이것이 최고의 살균제다”라고 말하는 것도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다. 균이나 바이러스같은 미생물보다 상식을 거부하려는 오만과 편견이 더 위험하다는 교훈이다.

우리나라 보건당국도 지난 5월 메르스사태 때 첫 환자가 여행한 중동 국가가 사스 발생 국가가 아니라고 진단조차 거부하는 관료적 태도로 일관하다 방역의 초동대처 기회를 놓쳤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는 2003년 사스 발생시 초기 이를 은폐해 전세계로 사스를 확산시킨 중국 정부의 행동과 비슷하다.

헝가리 정부는 1969년 외롭게 죽어간 제멜바이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부다페스트 의과대학을 제멜바이스 의과대학(사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위키미디어

헝가리 정부는 위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냉대를 받고 사망하는 그를 기리기 위해 지난 1969년 부다페스트 의과대학을 제멜바이스 의과대학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오스트리아 정부도 그의 동상을 세우고 그의 얼굴을 모델로 한 동전을 발행하기도 했다.

권은중 기자 detail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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