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5.17 17:10
수정 : 2017.05.17 17:35
얼마전 중국 쓰촨성 청두의 한 체육관에서는 태극권과 격투기의 시합이 있었다. 이종격투기 선수 출신인 쉬샤오둥씨가 인터넷 상에서 중국 전통무술인 태극권을 비하하면서 태극권 수련자와 설전이 벌어졌고 결국 실제 대결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결과는 태극권의 참패였다. 20초만에 KO승을 거둔 쉬 씨는 “중국 전통 무술은 시대에 뒤떨어졌고 실전 가치가 없는 사기”라면서 언제든지 도전을 받겠노라고 공개적으로 무술인들을 자극했다. 이에 맞서 중국 여러 문파의 고수들이 도전장을 던졌고 한 기업인은 중국 무림의 자존심을 회복시켜줄 호걸에게 1000만 위안을 내놓겠다고 선언한 상태다.
고전적 수련법과 현대적 훈련체계 간의 객관적 우열을 가리기 위해서는 개인기량의 차이, 규칙의 문제 등 통제해야할 변수들이 다소 남아있지만, 꼭 거기까지 확인해보지 않더라도 전통무술이 현대 격투기에 비해 실전적 효용이 떨어진다는 것은 이제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다. 각종 격투대회 성적은 물론이거니와 두 가지 시스템 하에서 짧은 기간에 여러 사람을 훈련시켰을 때 평균적으로 도출될 결과를 상상해보라.
동양적 지혜의 집약체인 전통무술이 (그에 비하자면) 건조하기 짝이 없는 기계적 트레이닝 앞에 무릎을 꿇은 셈인데, 중국인들에게는 ‘동아시아의 병자’로 취급당했던 과거의 쓰린 기억을 떠오르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몇 해 전 인공지능 알파고에 의해 인간만이 할 수 있다고 자부했던 영역이 침범 당했을 때 느꼈던 당혹감, 불쾌감이 되살아난다. 이것은 일개 무술문파만의 문제가 아니라 보기에 따라서는 문명의 자존심을 위협하는 사건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이전부터 병폐로 지목되어온 무술계의 신비주의적 풍토와 그것을 강조하면 할수록 더욱 선명하게 대비되는 ‘맥 빠지는’ 실기수준을 떠올리자면 차라리 통쾌하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제대로 된 모습에서 볼 수 있었던 소중한 가치마저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꽤 오랜 기간 무도는 실전적 효용과 정신수양의 가치가 혼재된 상태로 전승되어 왔다. 그러나 점차 외부적 변화 혹은 내부적 선택에 의해 격투술로서의 가치 보다는 수행적 가치를 중시하게 되었으며 이제 그 흐름을 뒤집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이종격투기의 등장으로 ‘고전적 무도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의 근원적인 물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언뜻 보면 위기처럼 느껴지지만 무도만의 확고한 정체성, 다시 말해 격투기술 이상의 존재 이유를 분명하게 세운다면 오히려 존재를 강화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최초에 수학 연산을 목적으로 개발된 컴퓨터가 장차 다가올 미래에 온라인 게임을 위해 봉사하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더군다나 자신의 사고엔진이 모바일로 진화하여 인간 삶의 양식과 산업의 흐름마저 바꾸리라고는 차마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 운명으로,개체를 보존하고 강함을 추구하려는 동물적 본능으로부터 기원된 무도수련은 이제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신체에 각인되어 있는 감정 작동의 원리를 정신수양의 방법론으로 전용(轉用)한다고나 할까. 골프, 테니스, 야구 등의 스포츠에서 신체 각 부위를 올바르게 정렬하고 적절한 협업을 통해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였을 때 찾아오는 쾌감이 있다. 잠재적 신체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조직해낸 행동에 대한 보상일테다. 한편 그러한 정확한 힘의 행사에는 언제나 정신적 각성이 동반된다.
|
무도인의 길을 묻는 육장근
|
그 집중이 짙어지면 우리는 그것에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무도수련은 바로 이러한 매커니즘을 지혜롭게 활용하여 수행의 방법으로 삼는다. 각 동작으로부터 유도되는 몸과 마음의 상태는 고유한 색채와 격을 지니고 있는데, 우리무예의 옛 스승들은 어떤 동작이 품고 있는 힘의 성격이 곧 정신의 질을 결정 짓는다고 보았으며 몸짓으로부터 유도되는 마음의 상태를 중요시했다. 격투술에서 한차례 추상화된 무예의 몸짓은 이제 문화적 산물로서 독립된 생명력을 가지고 전승된다. 선대 수련자들의 역사적 경험과 그들이 공유했던 정신세계가 무예의 동작 속에 고스란히 남게 되고 그 동작을 수행함으로써 그 거대한 정신의 맥락에 접속하는 것이다.
이제 남는 물음은 한 가지다. 왜 여전히 격투행위의 형식을 유지하는가? 쓰지도 않을 거면서.
정신수양의 추구한다지만 막상 동작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그렇게 하면 죽어! 그건 통하지 않는 수야.”라는 말을 듣게 된다. 어찌보면 역설이자 모순처럼 느껴질 수 있는데, 바로 그 간극이야말로 무도가 존재하는 자리이다. 실전적 긴장감을 상실하는 순간 그 행위로 동반되는 정신의 상태 또한 희미해지게 되므로 살심과는 또 다른 어떤 치밀함이 서려 있어야 한다. 정신수양이라고 하였을 때 그 정신이란 것이 다른 데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동물적 행동패턴, 반응기전에 근거를 빌리고 있는 만큼 고매한 정신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엄정하게 기술적 완성도를 추구해야만 한다.
저 아득한 곳에서 일렁이기 시작한 파도가 밀려와 해변가에 서 있는 나의 발등을 적시듯, 우주가 팽창하고자 하는 의지가 생명체의 본능으로 구체화되고 그것이 인간에 이르러 정신적 가치로 전화되기까지 얼마나 먼 길을 걸어왔을까. 익숙한 목표를 상실한 채 허공에 내지르는 무인의 주먹은 어쩌면 그 본원적 힘에 합일하고자 하는 의지는 아닐까. 무도의 길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육장근 (전통무예가)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