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공계-인문사회계의 차이점과 공통점 나는 여가-관광학이라는 어쩌면 조금은 생소한 학문을 공부하는 사회과학도이다. 국내에 관광학 전공의 학문이 대부분 경영학 계열이 강한 반면, 관광학 전공 중 여가학(leisure studies)이라는 세부 전공은 약간 사회학과 사회심리학에 보다 가까운 특성을 갖고 있다. 사회과학도라 하더라도 개인적으로는 학문의 다학제적 접근을 통한 연구에 상당히 관심이 많아서, 생명과학 전공 계열과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한 바 있고 대학원에서 이공계 계열에서는 그나마 사회과학에 가까운 도시공학 전공 계열의 수업을 들은 바 있다. 이렇게 다학제적 접근을 통해서, 학문에 대한 접근 방법이나 논문을 쓰는 방식이 참으로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생명과학 전공 계열과 같이 프로젝트를 할 때의 일이다. 프로젝트는 희귀종 서식동굴 생태계 발굴 및 생태관광 관리 기법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는 것으로 생명과학 전공 계열에서는 생태계 발굴을 실시하였고, 관광학 전공 계열에서는 이러한 생태계가 발굴되는 형태에 따라 관리지역을 설정하여 관리 기법을 연구하는 생태관광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이 당시에 서로 논문을 쓰는 방법과 연구기법에 대해 신기해 했던 일이 생각이 난다. 생명과학 전공 계열은 답사를 가서 하루 종일 생물종을 채집하느라 동굴내에서 계속 지냈고 여기에서 채집된 생물종을 배양한 결과로 논문을 썼고, 관광학 전공 계열은 답사를 가서 동굴 내외의 관광객 행태를 관찰, 설문방법을 통해 이를 분석하여 행동 예측한 결과를 가지고 논문을 썼다. 생명과학 전공 계열 연구진이 보기에 우리들의 답사와 연구방법은 참 편했으리라. 자신들은 그 껌껌한 동굴내부 물속에서 며칠동안 생물을 채집하고, 채집된 생물을 또 연구실로 가져가 배양하는데 우리는 관광지에서 관광객이나 만나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연구방법과 논문을 쓰는 방법이 다르다 하더라도 당연히 학자로서의 지켜야 할 것들은 있었다. 당연히 논문의 데이터는 사실에 입각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논문의 데이터가 적다고 해서 뻥튀기 하는 일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데이터가 적으면 적은대로 의미가 있는 것이고, 여기에서 나온 결과 자체에 대한 시사점 자체가 후속 연구에 도움을 주게 된다. 만약 황우석 교수가 줄기세포가 1개면 어떻고, 3개면 어떻냐는 이야기를 논문을 쓰기 이전에 했다면 그의 말은 타당하다. 곰팡이에 오염되었다는 것을 논문에 썼다면 그만큼 줄기세포 관리에 대해 조심해야 하고 그만큼 줄기세포 복제가 어렵다는 것을 시사해주기 때문에 학계에 도움을 줄 수 있다. 만약 황우석 교수가 그렇게도 잘 사용하는 ‘대한민국’ - 일반인들이 축구 응원할 때말고 저 네 글자를 잘 사용하는지를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을 위해서 그가 데이터를 뻥튀기했다면 그는 일그러진 애국주의에 물들었다고 볼 수밖에 없으며, 본인이 배아복제 줄기세포 연구를 선점하여 계속 지원을 받기 위해 데이터를 뻥튀기 했다면 그는 대단히 불순한 의도로 학자의 양심을 판 것밖에 되지 않는다. 이는 이공계건, 인문사회계이건 간에 학문을 하는 사람에게는 상식이다. 학자에게 있어 학자적 양심은 생명과 같다 황우석 교수는 학자적 양심에 대해 어떻게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에 대해 이공계와 인문사회계 모두의 시각으로 볼 때도 일반인들이 보는 것과 약간 그 문제를 달리하는 것들이 존재한다. 우선, 연구원 난자의 이용에 대한 문제. 네티즌들은 연구원들이 순수히 자원해서 난자를 기증했는데 무슨 문제냐고들 한다. 하지만 국내 대학원 현실은 불행히도 교수-제자 상하관계가 대단히 뚜렷하다. 김선종 연구원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레이드’가 안 되는 현실에서는 내부 회의를 통해 난자가 부족한데 연구원의 난자라도 기증이 되야 하지 않겠냐는 논의 자체가 압박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다. 거기에 17일 김선종 연구원이 기자에게 이야기한 것처럼 연구실 분위기가 군대와 같았다면 그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이에 대해서 김형태 자문 변호사가 이야기한 것처럼, 난자 기증을 한 연구원이 괴로워했다는 것은 그들이 자원하였다 하더라도 상하관계에서 이루어진 암묵적 강요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다음, 학자로서 이해하기 어려운 언론의 적극적 이용 문제. 이미 영롱이, 백두산 호랑이 복제 때부터 황우석 교수는 언론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황우석 교수는 수 차례 언론에 특정 부분의 연구에 지원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기고를 한 바 있다. 이게 무엇이 문제냐고 하겠지만, 적어도 사회과학도의 눈에서 볼 때 학문을 하는 사람은 진실 추구와 사회의 문제에 대한 비판이 생명이라 생각한다. 언론에 본인의 의견을 내는 것은 자유지만, 그 의견이 자기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 내용을 기고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가? 특히, 연구비 지원 총액은 일정한데, 자기가 하는 연구의 중요성에 의해 기초 연구 분야의 지원이 감소된다면 그것이 학자로서 온당한 처사라 할 수 있는가? 하지만 여기까지 넘어갈 수 있다 치자. 수염을 안 깎고 병실에 누워있는 모습을 취재기자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사진기자만 출입을 하게 한다거나, 16일 밝혀진대로 김선종 연구원에게 언론 대처방법을 써서 주거나, 안규리 교수와 YTN 기자가 동행하게 한 일련의 언론 관련 사건들은 순수한 학자라고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면이 너무나 많다. 마지막, 논문 조작 문제. 앞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이는 이공계뿐만 아니라 인문사회 분야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특히 논문의 성과가 훌륭하여 연구비가 지원이 되었다면 이는 상당히 심각한 일이다. 피츠버그대 이형기 교수의 기고대로 이는 향후 연구비 지원은 중단이 되어야 하며, 지금까지 받은 연구비 또한 내놓아야 할 일이다. 그런데도 16일 과학계에서 논문조작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기사가 나왔을 때 네티즌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다른 학자들의 질투가 아니겠냐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이는 연구를 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기본이다. 질투와 시기라고 치부하는 네티즌들이 공부를 한다면 과연 학계가 어떻게 될까라는 무서움부터 엄습해 온다. 결과가 안 나오면 데이터값을 조작하고, 데이터와 샘플수가 부족하면 적당히 ‘0’ 하나 더 붙이고, 유의도가 나오지 않으면 적당히 p-value를 낮추어 별표를 붙이게 되더라도, 연구 기술이 있으니까 상관없다고 이야기하게 되지 않겠는가? 이는 말이 안 되다. 학자에게 있어 학자적 양심은 생명과도 같다. 황우석 교수만이 모든 책임과 부담을 지지 않기를 바라며 나는 이번 황우석 교수의 논문 조작을 보며 우리 학계 전체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보는 것같이 느껴졌다. 그동안 학술진흥재단 및 각 학교에서 교수 평가를 양적 성과로만 판단하거나, 스승-제자 상하주종관계, 전공불가침에 따른 침묵의 카르텔 등 학계에서의 금기가 사회보다 훨씬 심각한 수준에 있다는 것 자체가 황우석 교수 논문 조작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지 않나라는 생각이 든다. 전자의 성과주의는 황우석 교수가 논문 조작을 만들어낸 압박감의 계기라면, 후자의 학계의 금기는 연구원 난자 기증, 황우석 교수 문제에 대해 PD수첩만이 접근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황우석 교수는 분명 논문 조작이라는 거대한 실수를 했고, 이에 대해 수 차례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황우석 교수만이 모든 책임과 부담을 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의 행위는 분명 문제가 있지만 실제로 그가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강제된 행위는 사회구조가 양산해낸 것이다. 사회구조라는 것 자체가 행위를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제약이자 가능성이라는 앤소니 기든스의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지금 드러나지 않고, 또 드러나지 않을 것이며, 드러난다 하더라도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을 학계의 구조적 문제점이 제2의 황우석 교수 논문과 같은 사태를 만들어낼 것이며, 어쩌면 지금도 학계에서 크던 작던 이러한 논문 조작은 진행되고 있을지 모르겠다. 황우석 교수가 모든 과오에 대해 책임을 지고 논문 철회는 물론, 연구비 지원 등에 대해서 스스로 반납을 하고 처음의 자세로 연구를 진행하였으면 한다. 줄기세포 원천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할만큼 자신이 있다면 정부 지원이 아니고서도 민간 지원으로도 연구는 진행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황우석 교수가 이야기한 ‘월화수목금금금’의 달력을 다시 ‘월화수목금토일’ 달력으로 교체할 것을 희망해본다. ‘윤리’의 소중함과 ‘자본과 성과’만이 최선이 아니라는 것은 쉬는 시간도 있고 뒤도 돌아볼 수 있어야 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번 일로 상당한 충격을 받았겠지만 이번 사건에 대해 책임질 것만 지고 나머지는 훌훌 털고 연구에 매진하길 기대한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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