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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2.20 15:50 수정 : 2005.12.20 15:50

열림과 닫힘

논리학의 언어 중에는 형식논리(Formal logic)와 변증논리(Dialectic logic)가 있다. 형식논리는 현상을 그 자체로서 적확하게 분석하는 분석력에서 장점이 있어, 서양과학에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이는 아마도 서양과학이 닫힌계(Closed System)를 지향 하는데서 연유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다만 형식논리는 ‘변화’를 다루는데 부적합한 단점이 있다.

반면에 변증논리는 현상 그 자체의 관찰보다는 그와 관계를 맺고 있는 여러 가지 정황들과의 관계를 고찰하여 결론을 추론하는 일종의 관계논리이다. 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것을 우리는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해체주의의 창시자인 데리다는 ‘자아(自我)‘를 ’나 자신‘이라는 고립된 개체로 보지 않고 ’타자(他者)의 타자(他者)’로서 파악하면서, 관계맺음의 일원으로 투영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예로부터 동양의 자연철학은 사회현상을 파악함에 있어 닫힌계의 한계를 인식하고 열린계(Open System)를 지향 하여왔고, 이러한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파악한 연기(緣起)론이나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적 관점은 현대서양철학의 데리다보다 시간적으로나 관념적으로 앞서있다.


황우석 사태의 본질을 돌아보며

혹자는 현재의 황우석 사태를 그저 <과학 vs. 비과학>, 또는 <조작과 속임수 vs. 과학윤리>, 심지어는 <황우석 찬성 vs. 황우석 반대>의 문제로 단순화시켜 보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점차로 현재 벌어지고 있는 황우석 사태의 이면을 보려는 노력이 있음에 주목해보자. 우선 이번 사태에는 과학, 자본 그리고 언론이라는 필연적 요인들이 관계 논리적으로 개입되어 있음은 많은 이들이 동의할 것이다.

즉 문제의 본질을, ‘국수적 애국주의를 앞세운 조작이 가미된 과학이 옳으냐’ 아니면 진보성향의 신문들을 중심으로 한 ‘윤리적이고 검증된 과학이 옳으냐’의 것으로 몰아세우는 것은 다분히 그 배경에 깔린 정치적 헤게모니 게임만을 부각시킬 뿐, 본래 이러한 문제가 촉발되게 한 그 근저의 사회현상들에 눈감고 지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오늘도 TV를 켜면

오늘도 프라임타임 뉴스에서는 의료광고, 과학광고를 본다. 언제부터인가 과학전문기자, 의료전문기자들이 등장하면서 시작된 현상이다. 그들은 새로운 과학발명품이나 의료기술을 소개하면서 그것들이 우리생활에 끼칠 양면성을 풀어주기보다는, 이목구비촉의 말초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일방적인 홍보성 기사로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때로는 노골적으로 현재 금기시된 의료광고를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이 일방적인 홍보성향을 보이기도 한다. 새로운 발명품이나 학설은 ‘과학적’이라는 수식어만 붙으면, 마치 마약이 마약중독자에게 절대적 권위를 행사하듯이 과학으로 세뇌된 모든 민초들에게 무조건적이고 전폭적인 신뢰를 보장받게 된다.

이처럼 민중을 과학이라는 마약에 취하게 하여 현재의 <황우석 사건>에 불을 지른 자들은 누구인가? 그것은 진보와 보수를 떠나서 모든 신문과 방송의 매체들이며, 좀더 구체적으로는 자신들이 속한 분야의 일개 홍보기자로 전락한 의학/과학전문기자들이다.

그들이 써댄 과학홍보기사는 어디에도 그 과학적 발명품의 또 다른 어두운 이면을 자세히 알려주는 부분이 없다. 때로 정식 후에 나오는 디저트처럼 틀에 박힌 한, 두마디의 경고성 멘트로 때우는 것이 대부분이다.

즉 현재의 과학만능주의, 과학애국주의의 민중적 세뇌주체로는 바로 지금 갑론을박을 하며 싸우고 있는 언론집단들 스스로임을 각성해야 하는 것이다. 이들이 과연 그들의 지면에 ’집단적 광기‘ 운운하며 민중을 비판할 자격이 있는지 되묻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각 방송과 신문의 과학·의학전문기자들에게

묻는다. “그대들은 어떤 명분으로 기자로서의 녹을 받아먹는가? 그대들이 떠드는 과학이 그토록 장점만 있는 것이 사실인가? 그대들이 전문기자로서 활동하도록 요구받은 것은, 과학이라는 현상 뒤에 숨은 또 다른 얼굴을 민중들에게 정확하게 알려주고 그 폐해를 제대로 전달하도록 위촉받을 사실을 알지 못하는가?”

파렴치한 이전투구의 무대 뒤에는 과학이라는 마약을 두고 다툼을 하는 또 다른 실체가 있다. 이는 정치권력이며 그 정치권력의 추동력인 ‘거대자본’이다. 본디 서양과학이 본격적으로 발전한 계기는 ‘과학’이 이윤행위와 결합되면서, 이윤창출에 주체인 ‘자본’과 뗄 수 없는 결합관계를 형성한 점이라는 것에 주목해야한다.

황우석의 배아줄기세포연구 또한 난치병 치료라는 명분 뒤에 숨은 타락한 의료자본과 정부의 국가이윤창출이라는 이해관계와 맞아떨어지면서 그의 거대권력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어온 것은 우리가 익히 아는 바이다. 현재 우리가 황우석이라는 이름과 함께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노성일은 대표적인 의료자본가임을 잘 알고 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 그리고 나쁜과학이 좋은 과학을 몰아낸다

이제 ‘과학’은 과학으로 끝나야 하고 그것이 마약처럼 국민들에게 홍보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각각의 과학현상은 발전을 의미한다고 믿기 쉽지만 그 이면에 깃들인 부작용과 퇴보라는 또 다른 얼굴을 직시하도록 해야 한다. 이윤창출에만 관심이 있는 정치성 짙은 과학이 아닌, 많은 생명이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데 필요한 과학이 필요하다. 언론에서 정치적으로 홍보되는 돈 되는 과학이 활개치고 있을 때, 정작 생명이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좋은 과학은 뒷전으로 쫓겨나고 있다.

이제 과학의 올바른 모습을 알릴 때가 왔다. 이에는 현재 의학/과학의 광고기관으로 전락한 언론매체에 전문기자들의 각성이 필수임을 다시한번 상기시킨다. 과학이 본래의 모습으로 알려질 때 과학이라는 마약에서 깨어난 국민들에게는 이윤만을 쫓는 의료자본이 발붙일 곳이 없을 것이며, 국민의 세금으로 만들어진 과학기금은 좀 더 신중하게 집행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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