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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춘의 편지] 사형수 이철은 지금도 억울한가 |
“군사정권시절 사형선고를 받았던 사람이 애처롭고 연민까지 느껴진다고 했는데 정말 모욕적인 말이었다. 내겐 가장 심한 욕설이다.”
한국철도공사 이철 사장이 철도노조 위원장의 '연민론'에 발끈해서 쏟아놓은 격정입니다. 철도노조 파업을 탄압하면서 곰비임비 비판이 쏟아졌기 때문일까요. 그는 자신의 억울함을 여기저기서 토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뜻 돌아보더라도 억울해할 이유는 없어 보입니다. 그는 이미 수구세력으로부터 과도한 칭찬을 받고 있습니다. 가령 <조선일보>가 “철도파업 이후 ‘스타’된 이철 철도공사 사장”(2006년 3월 11일치)이라는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수구언론의 ‘칭찬’을 받은 그가 진보나 민주세력으로부터 비판을 받지 않겠다면 과도한 욕심입니다.
더 나아가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장 이철이 늘어놓았던 발언들을 뜯어보면 그가 얼마나 변했는가를 여실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령 그는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비정규직법안 개정과 직권중재 폐지 등에 대해 노조와 노동계는 당당히 얘기할 수 있다. 건전한 노동운동이다. 하지만 현재 직권중재를 어기면 불법이 된다. 의도가 좋더라도 불법행동을 정당화할 수 없다. 이 점을 명백히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2006년 3월 11일치).
어떻습니까? 저는 그가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를 떠올렸습니다. ‘의도가 좋더라도 불법행동을 정당화할 수 없다’면, 그는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지 말아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그는 살아 있습니다. ‘흉흉했던 민심’ 때문입니다. 박정희 정권은 ‘수습책’으로 살려주었습니다. 이미 20여 년 전에 국회의원이 된 그는 지금 철도공사 사장으로 노조파업에 강경대응으로 맞섰습니다. 불법파업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비판 여론이 빗발치자 사뭇 자신의 ‘관용’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와 박정희가 무엇이 다를 까요.
그는 시대가 변했다고 주장합니다. “그 당시 민주화운동은 명백한 사회정의에 어긋나는 헌법과 법규 아래 말할 자유도 없었다. 지금은 정당한 운동과 정당한 요구가 받아들여지고 있고, 적어도 정상적인 운동이 가능하다. 노동운동 자체를 탄압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습니다. 시대가 변했습니다. 그래서입니다. 과거의 잣대로 오늘의 이철을 스스로 평가하는 것은 자가당착입니다. 지금도 직권중재 폐지는 명백한 사회정의입니다. 하지만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습니다. 정상적인 노동운동이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노동운동 자체를 탄압하는 사람은 없다”는 그의 발언에서 박정희의 그림자를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장 이철은 KTX 여승무원들의 농성에 대해서도 “자신들이 비정규직의 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며, “화장실 청소 등 철도공사에는 더 열악하게 일하는 비정규직이 많다”고 살천스레 주장했습니다.
자신이 변절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이철 사장에게 묻습니다. 그렇다면 철도공사 사장 이철이 지금 할 일은 자리를 걸고 여승무원은 물론, 더 열악하게 일하는 비정규직의 해소에 나서야 하지 않습니까?
그의 발언은 노무현 정권이 비정규직 문제를 정규직 탓으로 돌리는 행태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노조의 “과도한 경영권 간섭”을 비난하는 모습도 그렇습니다. 게다가 “어떤 운동이든 대중(국민)을 떠나면 생명을 상실한다”며 노동운동에 훈계를 늘어놓는 풍경까지 똑같습니다.
무엇보다 노무현과 이철의 닮은 꼴 ‘압권’은 자신이 억울하다는 주장입니다. 그는 “철도공사에는 사장은 없고 노조위원장은 있다”는 말을 언론에 흘립니다.
철도공사 노조위원장이 그에게 연민을 느낀다고 발언한 게 모욕이요, 욕설이라는 '사형수' 이철, 그에게 한없이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사형수였음을 ‘훈장’처럼 게시하고 있기에 더 그렇습니다. 묻고싶습니다. 아직도 억울한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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