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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3.20 15:44 수정 : 2006.03.20 15:44

박래군. 이 땅의 대표적 인권운동가입니다. 1981년, 오월의 피가 아직 채 마르지 않아서이겠지요. 대학에 입학한 그는 가난한 부모님의 ‘기대’와 달리 학생운동에 나섰습니다. 저 ‘오월의 학살’ 앞에서 눈 감기엔 그의 눈빛이 너무 맑았습니다.

그 시기 당연한 수순이었지요. 전두환 군사정권은 청년 박래군을 강제징집했습니다. 똑똑한 아들을 귀여워하던 아버지는 실의에 젖어 폭음으로 나날을 보냈답니다. 어머니는 협심증을 얻으셨다지요.

생각해보십시오. 애면글면 키운 아들이 세칭 ‘명문대학’에 들어간 뒤 아버님-어머님은 얼마나 기뻤을까요. 전두환 정권에 아들이 쫓길 때 얼마나 절망했을까요.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일입니다. 학생운동에 나섰던 모든 젊은이들이 한번쯤 겪어야 했던 시련이기도 합니다.

박래군은 결연히 결단했습니다. 군 복무를 마친 1985년, 경기도 부평의 노동현장으로 들어갔지요. 그 뒤 오늘까지 박래군은 노동운동과 인권운동에서 단 한순간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박래군은 친아우이자 동지였던 박래전을 먼저 보내야 했습니다. 1988년 6월이었지요. 아우는 오월의 진상을 요구하며 스스로 온 몸에 불을 살랐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이겨내며 아우의 몫까지 살아 투쟁하겠다고 결기를 세웠습니다.

저 명망 높은 민주인사들이나 ‘반짝’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민주변호사들이 곰비임비 권력의 길로 줄달음 칠 때도, 그리고 하나씩 하나씩 예외없이 변절해갈 때도, 박래군은 춥고 배고픈 현장에서 민중과 더불어 살아왔습니다.

바로 그 박래군이 감옥에 갇혔습니다. 경기도 평택이었습니다. 대추리 농민과 더불어 농지를 지키려고 싸우던 현장에서 잡혀갔습니다.

언론이 방관하고 있지만, 지금 평택에선 농토 280만 평이 미군의 ‘침략 전초기지’로 둔갑하는 꼴을 더는 참을 수 없어 분연히 일어선 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박래군은 함께 구속된 조백기 인권활동가와 함께 들판 ‘황새울’에서 국방부의 농지 파괴 행위를 저지하고 있었습니다. 경찰이 강제연행하며 살천스레 밝힌 ‘죄’는 ‘특수공무집행방해’와 ‘국유재산관리법 위반죄’입니다. 검찰은 박래군이 “풀려날 경우, 향후 공권력과 더 큰 충돌이 예상된다”며 구속 이유를 밝혔습니다.

과연 그래도 되는 걸까요? 함께 현장에 있던 박래군의 후배 박석진의 토로에 당신이 귀 기울이길 권합니다.


“영국에도 핵잠수함에 잠입하여 군사기밀서류와 중요부품, 장비 등을 바다에 내던져 버려 잠수함을 무력화시킨 평화 활동가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영국 법원은 ‘장래의 더 큰 재앙과 전쟁을 막기 위한 목적이었더라면, 설사 그 행위가 법에 어긋난다 하더라도 죄가 되지 않는다’며 무죄를 선고 했습니다.”

인권운동사랑방에서 구속자가 발생한 것은 김영삼 정권시기인 1997년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형수’였던 철도공사 사장이 노동자를 탄압하는 오늘, 민주화운동의 훈장을 달고 국무총리까지 올랐던 인사가 골프광으로 ‘운동’을 이어간 오늘, 저 ‘민주변호사’가 청와대에 앉아 수구세력과 대연정을 도모하는 오늘, 박래군은 차디찬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래서입니다. 결연히 묻습니다. 누가 박래군을 감옥에 가뒀습니까? 박래군을 감옥에 가둔 저들을 우리 무엇이라 불러야 옳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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