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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5.02 14:33 수정 : 2006.05.02 14:33

내일은 근로자의 날이다. 우리집엔 근로자가 있지만, '근로자의 날'에 쉴 수 있는 근로자는 없었으므로, 늘 그냥 지나쳐갔는데, 올해는 우리집 '근로자'인, '아빠'도 쉬신다.

일주일만에 집에 올라와서(청주에서 하숙 중)좋아하는 찜닭먹고 있는데 아빠 하시는 말씀

"아~ 오십 평생 근로자의 날에 처음 쉰다. 허허허"

그 말이 그냥 칼날이 되어 가슴팍에 박혔다.

요사이 숙제로 조세희작가의 난쏘공을 다시 읽었다. 늘 '과제'로서만 읽게되는 난쏘공은, 고1 때와 대1 때와 대3 때가 다르다. 그 사이 사이 다행히 내 머리가 자랐는지 이해되지 않았던 소설들이 조금씩 이해가 간다. 물론 그마저도 책의 반정도, 아니 그 이하밖에 이해하지 못했지만, 내년이나 내후년이나 다시 난쏘공을 읽게 되면 그때는 또 이해가 되리라.


책 속의 사용자와 노동자. 난쏘공을 넘어 생각하면 거기엔 전태일이 있다. 그리고 전태일을 생각하면 그 속엔 내 '아빠'가 있다.

아빠는 1970년대 '서울로 서울로'에 힘입어 광주에서 서울로 오셨다. 그리고 종로 평화시장 어드메의 '공장'에 취직하여, 그때부터 작년까지 내내 '미싱'을 밟으셨다. 엄마도 한 십년은 아빠와 함께 '미싱'을 밟으셨고, 그 돈으로 나와 내 언니 둘을 키워주셨다.

언니들은 학교가고, 유치원도 못가던 어린 날의 나는 엄마 아빠 공장에서 심심하면 '시다'가 되어 '쪽가위'로 실밥을 뜯었고, '재단'판에서 색칠공부를 하고, 쪼무라기 헝겁천으로 '인형옷'을 만들면서 놀았다.

1990년대 초 서울시 종로구 청계7가 삼일아파트 7동 201호에서 하루 '100원'으로도 원없이 놀았던 작은 꼬마를 지켜보던 엄마 아빠는, '노동자'셨다. 그러나 그때의 엄마아빠는, '사용자' 밑에서 일한 것이 아니고 엄마 아빠가 옷을 만들면, 그냥 그 옷을 자전거에 실어 동대문으로 평화시장으로 납품하시곤 했다.

그렇게 한평생 '미싱'만을 밟던 아빠는 올해가 되어 '미싱 밟는 일'을 그만두셨다. 그리고 의자 만드는 공장에 취직하셨다. 내후년이면 예순이 되어가는 아빠는 그래서 그런지, 처음 직장 구할 때 '힘든 직장'만을 다니셨다. 그때의 아빠를 보며 나는 사회시간에 배운 3D란 단어가 생각났다. 그 3D직종의 주인공이 아빠가 된다는 사실이 이상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그러나 부끄러울 필요는 없었다. 아마 중고등학생의 나라면 부끄러워하겠지만 대학생의 나는, 아빠를 바라봤다. 아빠가 아빠의 삶에서 최선을 다하고 계심을 보았다. 지금 다니고 계신 직장도 의자 만드는 일(D회사 의자 같은 거)이라 공기도 안 좋고...그래서 피부가 이상해져서 병원에 갔다왔다는 이야기도, 스물한 살 막내에게 하셨다. 어깨도 다리도 참 아프다고 하셨다.

사용자 밑에서 '노동자'로서 일하고 계신 아빠, '근로자'로서 일하고 계신 아빠.

그 소감 어떠실까, '근로자로서 처음 맞는 근로자의 날', 그 느낌

"아빠, 근로자로서 처음 맞는 근로자의 날 어때?"

물으면 되는데 여전히 나는 마음으로만 묻는다. 내일 아침에, 아빠가 수원까지 태워다주신다고 했으니, 그때 살짝 여쭤야겠다. 막내딸답게.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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