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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6.30 13:32 수정 : 2006.06.30 13:32

24시간 내내 불을 켜두는 곳. 그곳에서 일을 하던 한 달 내내 밤은 왜 그리 길던지... 동쪽하늘이 부옇게 밝아오면 나는 한숨을 내쉬곤 했다. 인적이 끊기는 새벽이면 고립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는데 그런 시간에는 밖에 나와 잠시 달을 바라보기도 했다.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이라서 일을 하는 동안 즐겁기도 했다. 편의점에 들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조선업계에 종사하는 남자들이었다. 그들도 나처럼 애환이 많았다. 업계에서는 1순위인 회사였지만 의외로 그곳에는 하청회사가 많았고 거기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유럽인들과 몽고인 조선동포들이 있었는데 그중 몽고인들은 뭉쳐 다녔다.

가족 없이 지내야하고 험한 일을 해야 하는 그들의 모습은 초라했다. 안주 없이 술을 마시기도해서 짠한 생각도 들었다. 그들은 임금을 제대로 받을까하는 의구심이 생기기도 했지만 말이 잘 통하지 않으니 세세한 얘기는 물을 수가 없었다. 의외였던 것은 그들이 우리보다 영어회화를 잘한다는 점이었다. 나는 대부분 영어를 쓰는 외국인들과 얘기를 제대로 못해서 쩔쩔매기도 했지만 그들은 어느 정도 소통이 되고 있었다. 게다가 한국말도 곧잘 했다. 나는 편의점에 오는 손님들을 만나는 재미에 힘이 들어도 출근을 열심히 했던 것 같다.

열한시가 넘으면 술손님이 많아졌는데 나는 오히려 그런 시간이 즐거웠다. 술자리에 끼진 않았지만 그들에게 나는 이모나 어머니가 되었고 때론 누님도 되었다.


어차피 나도 임금을 받고 일을 하는 사람이니 열심히 하긴 했지만 실은 점주에 대해서 좋은 감정은 아니었다. 그들이 말하는 최저임금은 3100원이 아니었다. 최저임금을 자기들이 임의대로 정한 것 같았다.

일을 시작할 무렵 나는 그 일을 아주 가볍게 생각했었다. 자리에 앉아 바코드나 찍는 직업으로 생각했으니까.

나는 하루에 11시간 30분 동안 일을 했다. 컴퓨터로 되어있는 계산대는 생각보다 까다로웠다. 물건을 바꿀 때는 먼저 산 물건을 반품하는 것처럼 해야만 했다. 하나하나 바코드로 찍어 반품으로 계산을 하고 바꿀 물건은 따로 계산을 해야 했다. 게다가 가맹점 카드를 제시하면 할인을 해 주거나 적립을 하는데 처음에는 여간 복잡한 게 아니었다. 일을 마치는 아침 시간에 정산을 하면 간혹 계산이 맞지 않았다. 플러스로 나오면 점주가 가지면 되었고 마이너스로 나오면 내가 돈을 메워야 했다.

가게의 규모가 크진 않았지만 할일도 꽤 많았다. 매장의 물건이 팔리면 채워야 하고 새벽이면 매대 청소를 해야만 했다. 매대 청소가 끝나면 물건이 들어오는데 정리하는 것 또한 한 시간 이상의 시간이 걸리곤 했다.

점주는 일을 시작하던날 내게 이렇게 말했다.

“시간이 널널하기 때문에 인터넷에 접속할 수도 있구요. 대학생들은 리포트 작성도 여기서 한답니다.”

얼마나 달콤했던 소리던가.

몹시 바빴던 날 아침에 냉장고에 들어갈 물건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다는 핀잔을 들었다. 슬그머니 부아가 나서 밤새도록 바쁘게 일했는데요, 라고 대꾸를 했다. 점주는 인상을 쓰더니 그래서 아줌마들을 안 쓰고 고분고분한 대학생을 쓴단다.

내가 일하는 동안의 매출이 하룻밤 새에 60-80만원 정도였으니 절대 한가할 수는 없었다. 일을 하던 중간에 아는 근로감독관에게 자문을 구했다. 시간당 최저임금은 3100원이며 밤에는 50%를 더 받으니 시간당 4500원. 일주일에 44시간 이상을 일하면 오버 타임으로 따로 받아야 한다. 나는 일주일에 68-69시간을 일했으므로 오버타임의 액수도 꽤 된다. 그러니까 점주가 50만원 이상을 떼어먹는 셈이다. 나는 한달 째 되던 날 임금에 대해 다시 물었다. 시급과 야간수당, 그리고 오버타임. 점주는 길길이 날뛰었다. 법을 잘 아는 것 같은데 법대로 하라는 둥 하더니 당장에 그만두라한다. 점주의 태도를 보던 나는 어느 시대인지 잠시 헷갈렸다. 2000년대가 아니라 1980년대라고나 해야 할까.

삼각 김밥, 라면, 햄버거...평소 잘 안 먹던 그 음식은 나를 질리게 했다. 거길 그만두고 보니 된장국에 먹는 밥이 최고이다. 덕분에 살도 몇 킬로 빠졌다. 다만 아쉬운 것은 마트를 들르던 많은 사람들과의 헤어짐이다. 그들은 나에 대해 물을 지도 모른다. 군대 간다면서 병에 담긴 스타벅스 커피를 사주고 가던 젊은 친구가 생각난다.

“어머니, 훈련이 끝나면 다시 뵈어요.”

입대하는 그 청년은 한 달간 훈련을 받아야 한단다. 방위로 간다는데 키가 크고 미남이다. 요즘에 방위는 용모가 되어야 하나보다, 라는 농담을 했었다. 그 청년은 한달후까지 내가 편의점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소장을 제출해야하기에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이다. 나보다 그 후에 와서 일할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나는 그 일을 해야만 하므로...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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