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우 개선 깃발 든 문계순 엑스트라 노조위원장
밤 12시 서울의 한 전철역 앞, 어둠 속에서 모여든 보조 출연자들이 인원을 파악한 후 버스에 오른다. 밤새 차를 타고 새벽에 지방의 한 드라마 촬영장에 도착한 이들은 분장을 하고 오전 6시부터 촬영에 투입된다. '반장'으로 통하는 보조 출연 관리자는 60~70대 '엑스트라'들에게도 반말로 지시를 내린다. 오전 촬영을 마치고 주어진 잠깐의 점심시간, 현장에 제대로 된 식당이 없어 컵라면과 삶은 계란 등으로 허기를 달랜다. 오후 6시 촬영을 마치고 다시 서울로 출발한다. 해산한 뒤 집에 도착하니 시간은 어느덧 새벽 2시. 보조 출연자 A씨의 드라마 촬영 경험을 재구성한 것이다. A씨가 이렇게 26시간을 보내고 받을 돈은 출연료 3만7천원과 식대 4천500원 등 총 4만1천500원이다. 출연료는 촬영시간 12시간 기준으로 계산되기 때문에 이동시간은 포함되지 않는다. 이렇게 생활하던 보조 출연자들이 "촬영현장에서 사람 대접을 받겠다"면서 노동조합을 만들고 처우 개선을 주장하고 나섰다. 현재 보조 출연자로 활동하는 인력은 총 5천여 명 정도이며 아르바이트가 아닌 '생계형' 보조 출연자는 1천 명 선으로 알려졌다. 이 중 지금까지 서울지역 보조 출연자 노조에 가입한 이들은 500명에 이른다. 이들이 받는 출연료는 드라마의 경우 기본이 3만5천~4만원 선. 오후 7시가 넘으면 50%, 자정이 넘으면 100%가 추가된다. 그 외 식대 4천500원. 밤 12시에서 새벽 5시 사이에 집합하거나 해산할 경우 교통비 5천 원 정도가 지급된다. 영화나 CF 촬영은 당일 기본급이 3만 원 선이다. 보조 출연자 노조 초대 위원장 문계순(51) 씨는 "한번 촬영장에 나가면 2박3일 정도가 필요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다른 직업을 가지기가 어렵다"면서 "이처럼 전업으로 보조 출연을 하지만 지금의 출연료로는 생활이 되지 않는다"고 출연료 인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그는 이어 "현장에서는 30대 반장들이 70대 어른들에게 반말을 하며 비인간적인 대우를 하기도 한다"면서 촬영장에서의 처우 개선을 요구했다. 문 위원장은 보조 출연 경력이 2개월밖에 되지 않는다. IMF 사태 이후 남편의 사업이 어려워져 7년간 식당일을 했다는 그는 최근 우연히 보조 출연자 모집 광고를 보고 일을 시작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보조 출연자로서 활동한 그는 열악한 환경을 바꾸기 위해 직접 나서게 됐다. 그는 "보조 출연자들이 수십년간 사람 대접을 못 받으며 일해왔지만 불이익을 받을까 우려해 누구 하나 쉽게 나서지 못했다"면서 "노조가 만들어진 것만으로도 조합원들은 감사하고 좋아하고 있다"고 말했다. 보조 출연자들의 한숨은 결국 천정부지로 치솟는 스타들의 출연료에 더욱 깊어졌다. 문제는 스타들의 출연료가 급등하면서 보조 출연자들을 포함한 다른 부문은 오히려 더 힘들어졌다는 것. 한 관계자는 "스타들에게는 편당 수천만 원의 출연료를 주지만 보조 출연자들은 밥 한 끼 제대로 안 먹이는 게 현실"이라며 "현장에서 갖은 고생을 하고 3만 원을 받는 보조 출연자들은 스타들의 억대 출연료에 속이 뒤집힌다"로 말했다. 보조 출연자들뿐만 아니라 보조 출연 업체도 힘들기는 마찬가지. 형편이 어려워 부도 위기에 놓인 곳도 있으며, 4~5개월째 출연료를 지급하지 못하는 곳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보조 출연자들의 열악한 환경에 공감한다"며 화살을 방송사 등으로 돌린다. 한 보조 출연 업체 관계자는 "보조 출연자들은 비를 맞고 땀에 찌든 옷을 빨지도 않은 채 계속 입어 피부병에 걸리기도 일쑤"라며 "현실이 너무 비참하지만 대우는 달라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방송사 등에서 출연료를 올려주지 않아 4~5년째 가격이 그대로이지만 업체들도 '울며 겨자먹기'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보조 출연자들이 당장 환경을 바꾸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노조를 결성했지만 거대 방송사나 영화사들을 상대로 한 싸움은 메아리 없는 외침이 될 수도 있다. 문 위원장은 "아직 방송사 등에서 아무 반응이 없지만 반장들의 태도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면서 "과연 우리가 얼마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천천히 하나하나씩 바꿔가겠다"고 말했다. 한편 지난해 12월에는 영화 스태프들이 결성한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이 출범한 바 있다. 강종훈 기자 double@yna.co.kr (서울=연합뉴스)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