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득히 생의 침목들이 종대로 누워있는
불친절한 레일 따라 새벽보다 먼저 도착한
출발과 종착이 따로 없는
반복노선 위의 그들
뿌옇게 모여 있다 저것 보아라 허연
석탄이다 한나절 운행할 연료구나
무럭무럭 수증기가 일렬로 줄을 세운다
달려가려면, 책임지고 가려면 입빠이 퍼 담아야 한다
무럭무럭 집하장에 수증기 가득하다
객차 없는 기관차들, 아니다 승객을 품고 있는
왕복열차다 벗어날 수 없는 감가상각의
평행선 위로 떠밀리거나 달음박질치는 그들
모여 있다 길게
구불구불, 그러나 끊어지지 않는 일상의 궤도들
냉기에 얻어맞은 자국만 벌겋다 저만치 낯익은 얼굴 보인다 누구시더라 구부정하고
작은 키에 비루한 작업복 차림
내가 타고 온, 누이들이 앉아있던
오래된 기관차
아직 내리지 못한, 내리고 싶지 않은
낡은 기관차, 아버지
-은물결- 늦어도 다섯 시에는 일어나야 조회시간에 맞출 수 있을 게다. 거개가 멀리 살고 일거리 있다는데 출퇴근 거리를 따질 일이 아니려니. 인근 여관에 장기투숙하는 사람들도 있다. 맛 나는 식당이 주변에 널렸지만 돈이 우선이다. 3,500원에 한 끼 때우기가 어디 쉬운가. 새벽잠 쫓으며 일터로 나온 근로자들이 함바(식당)에 모여 있다. 얼른 먹고 조회에 참석해야 반장의 잔소리를 면할 수 있을 테니 서두를 수밖에.
젊은 노동자가 없는 건설현장이라 다들 가장이고 믿음직한 남편이다. 투박하고 목소리 커도 자상한 아빠일 게다. 먼지가 생활고처럼 더덕더덕 붙어있는 작업복 차림의 그들이 기관차처럼 보인다. 힘차게 가정을 이끌고 가는 기관차 말이다. 남루한 차림새 안에는 봄날 같은 아이들과 꽃 같은 아내가 웃고 있겠다. 어린 것들의 잠자리를 돌아보며 나왔을 게다. 어쩌면 아내와 함께 나선 맞벌이 부부인지도 모른다. 형광등에 반사되는 저들의 입김이 환하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밥 한 사발씩 퍼 담고 있다. 국에서 나는 훈김도 식당에 너울거린다. 아내가 차려주는 밥상만이야 하겠나만 차가운 날씨에 뜨거운 밥과 국이면 한나절 견딜 수 있겠다. 연변서 왔다는 식당 아주머니 웃음도 겉절이 못지않게 싹싹하다. 장사야 애비도 속이는 일이라지만 역시 밥장사가 제일이다. 춥고 배고픈 사람들에게 감투밥 한 사발씩 퍼주는 것보다 든든한 일이 또 있을까. 벌겋게 얼었던 얼굴들이 조금씩 풀리고 있다. 빙판 같은 삶도 저렇게 해빙 되었으면 좋겠지만 여건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가만, 저 뒷줄에 낯익은 노인네가 보인다. 이럴 수가. 30년 전 아버지는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셨다. 나중에야 함바에서 드셨지만 내게는 아버지의 양은도시락이 선명하다. 서둘러 나가시면서도 어린 것들 이부자리는 매만지셨을 분이다. 가슴이 철렁했는데 자세히 보니 아버지와 무척 닮은 사람이다. 아버지도 저렇게 식당에 줄 서서 차례를 기다리셨겠지. 푸석한 정부미로 한 밥이지만 뜨끈하게 드셨겠지. 한 술 뜨시면서 아침도 거르고 나가는 아들딸들을 걱정하셨겠지. 잘 자라서 이만이나 살고 있는데 조금 더 오래 계셨다면 좋았을 것을. 상념보다 희망을, 회한보다 내일을 본다. 무럭무럭 김나는 식당에서 건강한 하루를 퍼 담는다. 저들의 억센 팔이, 작업반장의 힘찬 목소리가 하나 되어 어둠을 밀어내고 있다. 오늘도 망치와 톱이 분주히 돌아갈 것이다. 크레인도 한 몫 단단히 해내리라. 아침이다. 오늘은 어디 먼저 돌아볼까?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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