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노동 노동환경 개선투쟁을 위한 변
먼저, 이 글은 글쓴이의 개인적인 생각임을 밝혀야겠습니다. 제목이 공적이기도하고, 글쓴이 개인의 한계를 초월하는 듯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제목을 이렇게 '거창한' 듯 표현한 것은 제목을 이 글 주제와 부합되게끔 딱히 정하기가 어려웠고, 이 글의 주제를 글쓴이 생각으로 적절하게 표현한다 싶기 때문뿐입니다. 참, 편하게들 말한다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사회의 집단 이기주의의 저변이리라는 판단에 미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나 배부르고 등 따시면 그만'이지'라는 느낌을 또 갖게 하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관점의 차이'가 아닐까도 생각해 보지만 그것이 면죄부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더욱 엄밀히 말해서 '비겁'한 면모가 아닐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확고합니다. 우리는 사회 생활에서 시시때때로 '작은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힘들게 일하고 얻은 '작은 보람'을 키워 나아가는 행복이랄까요. 그래서 그 작은 꿈들이 차츰 나의 희망을 부풀리는 행복, 그것의 고귀한 가치를 나로선 도무지 훼손할 수 없음 물론이려니와 그런 가치를 추구하지 못하고 도태되는 인간들에 연민의 정을 가진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싫기도 합니다. '게으른 자'에게는 당연히 그 파이가 줄어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경쟁을 뚫고 성공한 사람들에게 박수를 보낼 수 있는 것이고 치열한 경쟁에서 도태되는 인간까지 생각해 주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같은 생존의 법칙은 어디까지나 '합리적인 노동조건'에서만 정당하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중요한 가치는 일종의 '관점의 차이'에서 찾아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는 관점의 차이란, '사회적 관점'과 '개인적 관점'이어야 합니다. 전 '열악한 노동환경'에서의 경험을, 감히 말해 많이 소유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꽤 오래 전(만 2년이 채 안된), 난 막노동 판에서 본의 아니게 아주 진지한 대화를 하여야 했습니다.상대는 우리나라의 막노동판의 노동자들이 더 나은 환경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문제점들에 대하여 몹시(경멸어린 듯이) 부정적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노동자들이 악순환의 굴레에 빠져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막노동판 노동자들의 삶을 '그들 자신'의 책임인 것이며 노동 환경의 구조적인 폐해에 관해선 몹시 경시하는 투였는데, 요는 '자신의 가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더욱 열심히 노력하지 않고 사회 탓만 하는 것은 비겁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 사회에서는 언제든 개인이 자신의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면 항상 길은 열려 있다는 의미이고 일 개인이 자신의 진취를 위하여 노력을 쏟는다면 그 자체로 행복인 것이다라는 의미도 되었습니다. 그리고 삶의 희열은 고난을 뚫고 나아갔을 때 더욱 높은 단계에 이르는 것을 모르는가 하고 반문하였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 전 부인하지 못합니다. 그의 말은 전적으로 옳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난 미칠 것 같았습니다. 난 그의 생각이 좁은 의미에서만 옳다고 생각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새벽에 일어나 파견근로업체에 출근하고 일감을 소개받아 일터에서 아침 7시부터 시작하여 오후 6시까지 막노동을 하고 통상 6만원의 노임을 받아 생활하여야 하는 노동자들, 그리고 일이 고되어 한달동안의 수입이 20일 노동이 보편적이며, 노동자들은 일용직이기 때문에 법적인 복지장치, 그리고 휴일근무에 따른 수당, 상여금, 연월차 제도, 휴가제도 등등의 여러 노동자보호 장치가 전무하다시피 합니다. 노동시간은요? 하루에 보통 10시간 노동하고 일당 6만원이며, 그것은 곧 수입의 전부입니다. 또한 노동자들의 노임은 최근 10여년 동안 불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10년전 막노동꾼 노임이 6만원여였는데 10년이 지난 현재에도 그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노동 환경의 부조리에 대하여 필자는 여러번 생각을 표현하였고, 몹시 장황하게 쓴 글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선 간략히 표현하였습니다. 필자가 이렇게 간략히 표현하는 노동환경으로 인해 피폐한 노동환경을 가볍게 표현하였을까봐 두럽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 노동자들이 저 열악한 환경을 뚫고 진일보 하면 그것은 대단한 일임에는 분명하지만 노동자들이 저 환경을 뚫기 위해서 쏟는 노력이 '합리적인 임금체계, 합리적인 노동환경'하에서라면 더 높아지는 문제를 간과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회적인 관점'인 것입니다. 글쓴이는 노동환경의 부조리에 대한 논점을 이글에 싣지 않았습니다. 글쓴이는 우리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직업계층인 건설일용단순노동자들의 환경의 부조리를 거론하는 행위를 막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예시상의 비판자를 적어도 글쓴이는 온·오프를 막론하고 많이 경험하였습니다. 건설 노동자들은 정말 소외된 자들입니다. 우리도 언젠가 일상에서 추락하게 되면 막노동판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일본처럼 소외된 자들을 위한 장치가 발달할 정도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우리는 막노동이 주업이어도 노동자들을 위한 최소한의 제도의 장치하에 일반 국민들의 생활에 준해질 수 있는 여건을 바랄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옳습니다. 비겁한 것은 '행복'운운하며 투쟁자를 '사회탓'만하는 족속으로 몰아부치는 행위에 있습니다. 옳지 못한 것을 보고도 참고 넘기는 행위에서 얻는 희열(인내후에 얻곤하는 희열)은 좁의 의미에서의 희열일 뿐입니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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