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5.20 19:04
수정 : 2008.05.20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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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랜드 비정규직 해고노동자들이 15일 오전 서울 서초구 사랑의 교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박성수 이랜드 회장이 직접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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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 홍제동 반혼주의자와 만나 점심을 먹었다. 생계의 문제로 10년 가까이 주류사회에 몸담고 살았다는 그녀는, 지금은 모 여성단체에서 일을 하면서 여타 사회문제들과 정면에서 마주하며 살아가고 있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나게 된 것은, 회사와의 분쟁에 부딪쳐 지금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힘들어하던 작년 이맘쯤 그녀가 속한 단체가 주관하는 여성노동영화제에서였다. 여성스럽고 앳된 얼굴에 안경을 쓴 첫인상은 그닥 인상적이지 않았는데, 4개월쯤 지나 우연한 기회에 친구와 함께 찾았던 작은 영화모임에서 다시 만나게됐는데, 그날 내 친구와 나는 그녀의 명료하면서도 탄탄한 의식에 홀딱 빠져 밤새 술을 마시며 떠들어댔고 그날 부로 좋은 친구가 되었다.
그녀는 내가 알던 무렵부터 지금까지 줄곧 그녀가 속한 단체와 무관하게 이랜드 문제에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것은 한두달에 한번 만나는 사이인 나에게도 영향을 주게됐는데, 그 전까지 나에게 이랜드 문제가 안타까운 이슈임에도 불구하고 강건너 불구경같은 거리감이 있는 일이었다면 그 후로는 당장 내 몸에 옮겨붙을 정도의 긴박함은 아니더라도 바라보는 내 얼굴이 후끈하고 화끈할 정도로 거리감이 좁혀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며칠전 이랜드의 홈에버가 홈플러스로 넘어간다는 뉴스를 보면서도 나의 얕은 제반 지식과 당장의 내 문제에 함몰되어 별반 깊은 생각을 하지 못하고 지나쳤던 참이었다.
점심을 먹으면서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말에 그때까지 그닥 감정의 내색이 없던 그녀가 "나도 지난 몇개월 우울증을 흠씬 앓았어요"라고 대답을 했다. 무슨 일이 있는건가 걱정이 되서 물었는데 그녀의 입에서 이랜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분쟁이 시작되던 무렵과 달리 노동계와 재계와의 대리전 양상으로 커져버린 후 싸움은 끝나지 않았는데 일반 사람들의 기억에서 서서히 잊혀져 가는 지금, 힘들게 싸우고 있는 이랜드 언니들을 바라보고 함께 하면서 정작 그 앞에서는 보일 수 없었던 그녀의 짙은 설움과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그런 마음이나 이랜드 노동자들이 겪고 있을 심신의 어려움은 그녀의 얼굴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눈물을 흘리는 대신에 그녀의 이야기를 하는 온 얼굴이 울고있었으니까. 마음이 아팠고, 부끄러웠다.
그녀가 전해준 이랜드 소식 중에는 뉴코아 이랜드 노동자들의 7박8일간의 홍콩원정투쟁에 대한 소식이 포함되어 있었다. 대충 신문을 통해 알고는 있었던 홍콩원정 소식에는 내가 몰랐던 이야기가 섞여있었다. 이랜드 노동자들이 홍콩에 가기 위한 비용 마련이 쉽지 않은 문제였는데, 그 비용을 기륭전자 노조원분들이 십시일반 모아 해결해주셨다는 이야기였다. 이제 몇명 남지도 않은 기륭전자 노조 조합원들이 자기들도 막막한 생활과 싸움을 해나가고 있으면서 모아준 돈 덕분에 이랜드의 원정단은 낯설고 먼 타지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이었다. 기륭전자 조합원분들이 모아준 것은 그저 돈이 아니라, 눈물과 마음이었다. 이랜드 원정단이 이루고 돌아온 이랜드의 홍콩증시 상장 저지라는 성과는 그런 마음과 눈물이 만든 꽃이었던 셈이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떠들기만 했지 대체 이렇게 어려운 싸움을 하고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뭘 했던가 부끄러운 한편, 각종 일간지마다 한켠씩 차지하고 있는 미담란에 어째서 이런 감동적인 이야기가 소개되지조차 않는 것인지에 화가 났다. (그것이 이 이야기를 나라도 하자는 계기가 되었지만….)
오후에 인권위를 가야해서 점심만 먹고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서는데, 그녀가 망설이다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지금 어려운 싸움을 하고 있는 이랜드 언니들은 그러지않아도 생활이 넉넉하지만 부업을 나온 사람들이기 보다 생계를 위해 취업을 했던 사람들인데, 직장에서 밀려나 싸움을 하면서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은 중이며, 사람들이 CMS로 모아주는 돈으로 힘들지만 생활을 꾸려나가고 있다고 한다. "으니씨도 힘들겠지만, 괜찮으면 이랜드 일반노조 사이트에 가면 CMS를 할 수 있는데…. 해주면 좋을 것 같아요" 그녀는 자기에게 달라는 돈도 아니면서 그런 말보다 힘들게 말을 건네왔지만, 나는 너무 고마왔다. 도대체 부당한 일을 당한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사회를 변하게 만드는 그런 이들의 작은 발걸음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하면서 힘빠지고 미안하던 차였으니까.
월요일. 오늘 출근하자마자 이랜드 일반노조 사이트에 들어가 CMS 창을 열고, 점심시간에 밥을 먹는 대신 CMS 신청을 했다. 생각해보면, 한달에 하루, 점심을 먹는 대신에 내가 살고있는 세상의 한켠에서 힘든 싸움을 해나가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잠시나마 함께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에, 혼자 웅크려 앉은 자리에도 마음에도 햇빛이 스미는 것 같다. 사람이 사는 세상을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노력하는 당신들은 정말 아름답다. 이랜드 언니들도, 돈많은 사람들이 갖지못한 가슴을 단 돈이란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신 기륭전자 노동자분들도, 그리고 내게 늘 부끄러움을 일깨워주는 홍제동 반혼주의자 그녀, 모두 힘을 내길 바란다.
이랜드 노동자들의 투쟁기금 마련을 위한 CMS 모집 → http://www.elandtu.or.kr/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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