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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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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시’= 어시스턴트:견습공
하루 12시간 일해도 최저임금보다 못한 50만원
잡일 도맡고 합숙도 빈번, 선배는 “나땐 더했다 ”핀잔
‘미래 희망’ 담보로 마냥…“경험쌓고 싶어 꾹 참고 일해”
1970년대 서울 청계천에 즐비했던 ‘모찌꼬바’(방직공장)엔 ‘시다’들이 있었다. ‘찐빠’(불량)가 난 단추 하나 때문에 눈물을 쏟던 이들의 꿈은, 의젓하게 ‘미싱을 타는’ 선배 언니들이었다. 이들의 소박한 꿈은 한국의 ‘수출 경제’를 일군 원동력이기도 했다. 30여년이 지난 지금, 이른바 ‘지식 경제’로 탈바꿈한 노동 현장에는 ‘어시(스턴트)’들이 있다. 각 분야의 전문 영역에서 보조일을 하면서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는 ‘21세기 시다’들이다.
사진학과를 졸업한 최혜미(26·가명)씨는 지난해 초부터 10월까지 서울의 한 사진 스튜디오에서 ‘어시’로 일했다. ‘임금은 적고, 노동 시간은 길다’는 선배들의 말을 익히 들어왔지만, 실무 경험을 쌓겠다는 욕심으로 덤벼든 일이었다. 아침 일찍 출근하자마자 스튜디오를 정리하고 나면 곧장 당일 촬영할 장비를 세팅해야 한다. 촬영 현장에서 쓰일 의상 준비도 그의 몫이다. 사진 촬영에 필요한 사전·사후 작업을 거의 도맡아 하다시피 했다. 하루 평균 13시간씩 밤낮없이 한 달을 일하고 받은 첫 월급은 30여만원. 넉 달을 버티니 50만원으로 월급이 올랐다. “사실 친구들 만날 시간이 없으니 돈을 쓸 기회가 별로 없어요. 하루 세끼 밥 먹고 나면 일만 하니까 그 적은 월급으로도 생활이 가능하더라고요.”
돈도 돈이지만, ‘일을 배우겠다’는 목적에서 갈수록 멀어지는 현실이 더 힘들었다. 바쁜 업무 중에도 세탁물 찾아오기, 세금계산서 떼오기 등 온갖 잡일을 떠맡아야 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지만, 가끔 불만이라도 내비치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선배들은 “예전엔 더 심했다. 개똥이라도 치우라면 우리가 다 치웠다”는 말만 반복했다. 불규칙한 업무도 부담이었다. 촬영 스케줄에 맞춰 출퇴근 시간과 휴일이 들쭉날쭉이었다. 결국 몸에서 신호가 왔다. 일을 그만두기 얼마 전부터 최씨는 한 달 내내 월경이 계속됐다. 병원에선 스트레스 탓이라고 했다. 최씨는 결국 ‘어시’ 생활을 접고, 지금은 한 박물관에서 유물 사진을 찍는 일을 하고 있다.
사진뿐 아니라 영상, 만화, 광고 등 이른바 ‘도제식 노동’을 하는 업종에 종사하는 ‘어시들의 삶’은 최씨와 크게 다르지 않다. 불안정한 고용 현실과 낮은 임금은 공통적인 업무 환경이다. <한겨레>가 만난 각 분야 ‘어시’ 10여명은 평균 하루에 12시간 정도 일하고 50만원 남짓 급여를 받았다. 그러나 정부 기관 어디에서도 이들에 대한 정확한 실태는 따로 파악하지 않고 있다. 최씨는 “세무서 같은 곳에서 점검을 나오면 그냥 아르바이트라고 말하라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어시들 사이에선 “비정규직 아래 알바생, 알바생 아래 어시들이 있다”고 농담하곤 한다.
아르바이트보다 낮은 처우에도 이들이 ‘시다의 길’을 고집하는 가장 큰 이유는 ‘지금은 힘들어도 빨리 일을 배울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다. ‘바닥이 좁은’ 업종 특성도 어쩔 수 없이 열악한 환경을 이겨내야 하는 까닭 중 하나다. 사진 스튜디오에서 ‘어시’로 일하는 송아무개(26)씨는 “이 바닥에선 지금 당장 금전적인 부분만 따져선 답이 나오질 않는다”며 “기술만 믿고 스튜디오를 차린 유학파 사진가들도 망하는 경우가 많을 정도로 실력만큼이나 인맥이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영상 촬영일을 하는 배아무개(30)씨는 “일 잘한다는 평가를 받으면 정식 직원으로 뽑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일 하나를 하더라도 눈에 들기 위해 열심히 하게 된다”며 “그렇게 열심히 일을 배워두면 나중에 다 써먹을 데가 있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수습 때는 임금 한 푼 주지 않는 만화 어시, 온갖 잡일에 치이는 사진 어시, 일주일 내내 지방 출장을 다녀야 하는 영상 어시들이 과연 미래에 대한 희망을 이어갈 수 있을까? 한 지상파 방송사에서 드라마 제작 보조로 일하는 김아무개(28)씨는 “같이 고생을 해도 결국 (정규직과) 신분이 다르고, 일이 안 풀리면 마지막에는 어시들에게 화가 돌아올 때가 많다”며 “생각과는 현장 상황이 다른 경우도 많고 거의 일주일 내내 합숙을 할 정도로 일이 고되기 때문에 대부분 석 달이면 그만두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구직 소개 누리집의 ‘보조 모집’ 공고가 일년 내내 끊이지 않는 까닭이다. 노현웅 기자, 홍기정 인턴기자 golok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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