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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희오토’ 공장 앞에서 노동자들이 촛불문화제를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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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행’이 만난 비정규직 노동자들] ① 동희오토
100% 최저임금 비정규직…88만원 세대 ‘삼중고’
사회전체 생산력 불임시키는 불안정 노동 ‘양산’
이 기사는 ‘비정규직철폐를위한 미디어행동네트워크’ <미행(美行)>의 첫번째 프로젝트인 지역순회 사업 ‘미디어게릴라들이 비정규노동자들을 만나다’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미행>은 블로거와 인터넷TV팀, 작가와 만화가, 언론인 등 다양한 미디어 생산자들이 함께 모여 비정규 노동의 현실을 고민하고 해결을 모색하는 프로젝트팀입니다. <미행>의 지역순회 사업은 진보신당과 함께 앞으로 8차례에 걸쳐 진행됩니다. <편집자주>
정지훈(가명)씨는 스물 여섯 살이다. 소년처럼 해사한 얼굴과 대조적으로, 우람한 팔뚝에 힘줄이 툭툭 불거져 있다. 그는 현대기아 자동차 ‘모닝’을 만드는 동희오토라는 회사에서 수습직원으로 3개월을 일했다. 그리고 2008년 11월 6일자로 수습기간이 끝났다. 그러나 정식직원이 될 수 없었다. 수습기간이 끝나기 정확히 일주일 전, 채용취소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동희오토는 생산직 노동자의 100%를 최저임금선의 비정규직으로 꽉 채우는 기념비적 시도로 인해, 최근 몇 년 사이 경영계와 노동계의 주목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기업이다. 생산라인에서 일하는 850명 전원은 13개 사내하청업체에 소속돼 있고, 기아의 1차 협력사인 동희오토가 이들 업체와 노무도급계약을 맺는다. 국내최초의 완성차 위탁생산업체로서 ‘모닝 대박 신화’의 주인공이다. 이곳 비정규 노동자의 상황은 열악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지경이다. 1년차 직원의 2008년 시간당 임금은 3770원. 올해 법정최저임금이다. 다른 완성차 업체 정규직 노동자의 절반 수준이다. 그러다보니 이직률이 극도로 높아서 3년을 넘겨 일하는 노동자가 드물다. 민주노조를 만들려는 움직임이 보이면 해당 하청업체를 통째로 계약해지시켜 버리면 그만이다. 노동자의 요구는 철저히 무시된다. 기업 입장에서 보면 ‘꿈의 공장’, 노동자 입장에서 보면 ‘절망의 공장’이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제조업 분야에서 소위 ‘동희오토 방식’이 역병처럼 번져가고 있다.
목포 발안 기흥…, 비정규직 유랑기
정지훈 씨가 태어난 곳은 경기도 성남시, 지금 가족들이 살고 있는 곳은 전남 목포다. 지방에 있는 대학에 합격해 1학년까지 다녔지만, 군대에 다녀온 뒤 자퇴서를 냈다.
“집안형편이 어려웠어요. 지방의 작은 대학을 졸업한다고 해서 취직이 된다는 보장이 없잖아요. 사실 졸업한 선배들을 봐도 그랬구요. 무슨 일이든 일단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처음 갔던 회사가 목포의 삼호조선소라는 데였어요. 처음이라 그런지 많이 힘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정규직이였냐구요? 아뇨, 당연히 비정규직이죠.”
정지훈 씨는 조선소에서 7개월을 일하다가 다른 직장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경기도 발안에 있는 대연 에스티라는 공장이었다. 수습기간 1년을 넘기면 정규직을 시켜준다는 이야기가 결정적이었다. 휴대전화에 쓰이는 1회용 테이프를 제조하는 곳이었는데 조선소 일에 비해 몸이 덜 힘들었고, 대우도 좋았다. “동희오토는 생일날 1만 원짜리 상품권을 주는데, 대연 에스티는 5만 원짜리 상품권을 줬어요. 보너스도 600%였구요.” 이렇게 말하며 정지훈 씨는 살풋 웃는다.
“그런데 거길 왜 그만뒀나요? 일도 그리 힘들지 않고, 대우도 괜찮았다면서요?” “작업반장이랑 문제가 좀 있었어요. 버스가 끊길 시간까지 일을 시켜놓고 자기는 맨날 노는 거예요. 그러면 저는 혼자 일을 하다가 집에 택시를 타고 가야해요. 한두 번이면 참고 넘어갔을텐데 계속 그래서 제가 한 마디 했더니 그 뒤부턴 저를 더 괴롭히기 시작했어요. 결국 그만둘 수밖에 없었어요.” 그의 ‘유랑생활’이 다시 시작됐다. 경기도 기흥의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1년을 일했고, 다시 목포의 삼호조선소에 가서 일을 했다. 서해안 전역을 떠돌며 비정규직 일자리를 전전했던 셈이다. 그런데 저임금·비정규 노동으로 악명이 높은 동희오토에는 어떻게 가게 됐을까. 정지훈 씨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렇게 말한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막노동을 많이 하다보니 컨베이어 벨트 타는 건 오히려 쉽게 느껴졌어요. 수습이 3개월이니까 ‘3개월만 아무 소리 말고 버티자’라는 생각으로 정말 열심히 일했어요. 원래 대연에스티에 같이 있던 형이 동희오토에 취직하자고 해서 같이 입사했는데, 그 형은 일이 힘들다고 이틀만에 그만둬버렸어요.” 컨베이어 벨트 위로 날아간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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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희공장 앞 1인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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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권일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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