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8.11.18 19:11 수정 : 2008.11.18 23:43

일용직 노동자들이 17일 새벽 서울 구로구 구로동 로터리 주변에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불황의 겨울…벼랑 몰린 서민
⑤일하는 빈곤층

하청·파견 직원들 고용승계 불안 시달리고
퀵서비스 회사엔 전화벨 안울려 쓴 웃음만
“겨울도 오는데 여기서 잘리면 정말 막막”

“여기서 잘리면 진짜 막막하죠. 겨울도 오는데….”

지난 13일 오후 경기 안산시 신길지구의 한 아파트단지 건설현장에서 만난 임아무개(44)씨. 8m 깊이의 정화조 안에서 시멘트 바르기 작업을 하던 그는 불쑥 머리를 내밀며 일자리 걱정을 쏟아냈다. 이 현장 일거리를 잡은 게 두어달 전인데, 공사가 끝나는 내년 5월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현장마다 경기가 안 좋으니 사람도 최소한으로 쓰려고 하죠. 그나마 요즘같은 때에 일할 현장이 있다는 게 어딘데요.”

임씨는 “학원 보내달라고 조르는 아들 녀석” 이야기를 꺼냈다. 임씨의 한 달 벌이는 120만원 남짓이다. 임씨의 부인은 집에서 자동차 창문 스위치를 조립하는 부업으로 한달에 20만원을 번다. 그는 “생활도 빠듯한데 학원비는 도저히 엄두를 낼 수 없다”면서도 “일하다가도 아들 놈이 눈에 밟힌다”고 했다. 안전모를 벗은 임씨의 머리카락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8-2
노동 시장의 끝자락에서 온 가족이 매달려 근근이 생계를 잇는 근로 빈곤층들에게 ‘일자리 불안’은 이미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새 일자리는 일용직이든 용역직이든 하늘의 별따기고, 일을 하고 있는 이들도 ‘언제 잘릴지, 얼마나 깎일지 모른다’는 불안과 걱정에 휩싸여 있다.

올해 나이 예순인 정아무개씨는 섬유 수출업을 하다 2003년 부도가 난 뒤 ‘노가다판’에 뛰어들었다. 이 바닥에선 꽤 ‘짠밥’이 있는 편이지만, 요즘엔 “한 달에 열흘에서 보름은 일거리가 없어서” 쉰다. 가방 장사를 하는 둘째아들(38)은 “하루에 가방 2개 팔기도 힘들다”고 하소연하고, 동네에서 작은 제과점을 운영했던 막내아들(32)은 주변에 대형 프랜차이즈 제과점이 들어서면서 가게를 접었다. 이 때문에 자녀들이 대신 내주던 전기요금, 가스비 등도 올해 들어선 정씨가 직접 낸다. “현장소장이나 관리자들 쫓아 다니면서 ‘일 좀 시켜달라’고 하는데 나이도 있고 하니 영 힘들어. 지금껏 군산, 대구 등 전국을 오가며 닥치는 대로 일했는데, 이번 겨울이 지나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

하청, 파견, 용역 등 비정규직들이 느끼는 고용 불안은 공포에 가깝다. 대구 지하철 2호선의 한 역사에서 바닥 청소를 하던 윤아무개(55·여)씨는 “1년 단위로 용역업체가 바뀔 때마다 고용이 승계된다는 보장이 없어서, 우리 같은 사람은 연말만 되면 다들 바들바들 떤다”고 말했다. 윤씨가 소속된 용역 업체는 지난달 중순 ‘내년부터 작업시간을 1시간씩 줄여 월급을 19만원씩 덜 주고, 나가는 인원이 생겨도 충원을 하지 않겠다’는 계획을 일방적으로 통보해왔다. 윤씨는 “이건 말 그대로 파리 목숨”이라고 했다.

택시 운전을 하는 윤씨의 남편(59)은 일하는 시간은 전과 똑같은데, 한달 수입은 지난 9월께부터 30만~40만원이나 줄어들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윤씨의 아들은 내년 공무원 채용이 크게 줄어들 것이란 소식에 시험 준비를 접었다. 기업체 채용 공고가 뜰 때마다 닥치는 대로 원서를 쓰고 있지만, 올해 안 취업은 사실상 포기했다. 윤씨 부부는 외환위기 때 사업 실패로 빚을 얻어, 지금도 남편이 버는 돈은 대부분 빚을 갚는 데 쏟아붓고 있다. 그는 “내 월급 122만6천원으로 세 식구가 먹고 살아야 하는데 여기서 잘리면 진짜 큰일”이라며 “나나 남편이나 요령 피우지 않고 하루종일 열심히 일하는데 갈수록 살림은 쪼그라든다”고 하소연했다.


소규모 공장 밀집 지역에선 기계 돌아가는 소리를 듣기가 힘들어졌다. 지난 14일 서울 성동구 성수동의 한 판금공장은 한창 일을 할 오후 시간인데도 직원 6명이 난로 주변에 옹기종기 앉아 있었다. 오락기와 정수기 외형을 납품하는 이 공장에서 16년 동안 일했다는 홍아무개(66)씨는 “그동안 불황이 몇 번 있었어도 이렇게 일이 없기는 처음”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말부터 급격히 나빠지더니 요즘은 일주일에 절반은 노는 날”이라면서 “야근수당 받으며 밤 늦게까지 일하던 때가 그립다”고 했다.

이 공장 인근 퀵서비스 사무실은 배달원과 공장 직원들의 ‘동네 사랑방’이 됐다. 이 일대 공장의 기계부품 생산량이 줄어들면서 오토바이 배달 물량도 함께 줄었기 때문이다. 천호동에 시계부품을 배달하러 간다는 이아무개(41)씨는 “성수동에 20년 넘게 있었는데 지금은 아이엠에프 때보다 더 하다”면서 “지난해에 하루 10∼15번 배달을 나갔다면, 요즘은 많아야 6번”이라고 말했다. 또다른 배달원은 “퀵서비스 회사에 전화벨이 이렇게 울리지 않는다는 건 이 동네 공장들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뜻”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영세 의류공장이 밀집해 있는 서울 동대문구 창신동에선 ‘미싱 소리’가 끊겼다. 창신동의 한 가내공장에서 청바지와 면바지를 가공해 동대문시장에 납품해 온 김아무개(57)씨는 최근 직원 여섯 중 둘을 내보냈다. 그는 “남은 네 명도 일감이 없어 이렇게 놀고 있다”면서 “힘들다, 힘들다 해왔지만 이젠 진짜 이 일도 끝인가 싶다”고 말했다. 미싱 10대가 두 줄로 나란히 놓여 있는 김씨의 공장 안에서 미싱 1대만이 외로운 박음질 소리를 내고 있었다.

송경화 기자 freehwa@hani.co.kr

▶ 고수들 김장비법 풀었네

▶ 청소용역 ·영세공장·공사판…공포에 떠는 ‘실직 예비군’
▶ 아름다운 여체…그러나, 처연하다
▶ ‘문근영 악플’ 배후는 지만원씨?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