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11.25 09:59
수정 : 2008.12.01 22:39
[한겨레 시사다큐 ‘한큐’] ⑧기관사 윤상구씨 동행 취재기
외주업체 이직·강제 발령 등 칼바람에 뒤숭숭
‘합의없는 합의’에 터널만큼 긴 아쉬움 그림자
철도노조와 서울메트로노조가 지난 20일 파업을 예고했다가 막판 노사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되었다. 그러나 두 노조 조합원들의 속내는 여전히 뒤숭숭하다. ‘불발’로 끝난 것은 파업만이 아니다. 파업의 이유였던 회사의 일방적인 구조조정 정책을 철회하는 것 역시 ‘불발’로 끝났다. 한 지하철 기관사의 긴박했던 ‘파업 전야’를 동행했다.
총인원 20% 감축 맞선 ‘밥그릇 지키기 싸움’
“일자리가 한순간 사라질 수 있는데 파업을 반대할 사람이 있을까요.”
지하철 파업이 초읽기에 돌입한 지난 19일 오전. 서울 동대문 서울메트로 승무사무실에서 만난 기관사 윤상구(41)씨는 이번 파업을 ‘밥그릇 싸움’이라고 인정했다. 되레 ‘그게 어떻다는 것이냐’는 것이었다. 윤씨는 “먹고사는 문제가 달렸는데 파업을 하지 않을 수 있느냐”고 되물었다. 그러나 윤씨는 “이번 파업은 ‘밥그릇 크기를 늘려 달라’는 투정이 아니라 ‘밥그릇을 지키겠다’는 생존의 몸부림”이라고 말했다.
윤씨는 서울메트로에 93년 입사해 96년 1월부터 기관사로 일하고 있다. 경력 12년차로 중간 세대다. 그런데 윤씨는 요즘 회사가 실시하는 구조조정 대상이 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초등학생인 두 딸의 앞날을 생각하면 아직 한참 더 벌어야 하는 나이다. 회사는 최근 감원 숫자까지 공공연하게 제시하며 윤씨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다.
“적자 규모를 줄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고 하는데 지하철이 원래 건설 당시부터 적자를 안고 시작한 거였잖아요. 승무원 수를 줄인다고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까요.”
오후 1시30분. 윤씨가 동대문운동장역에서 오후 열차 운행의 경적을 울렸다. 1평 남짓한 비좁은 기관실에서 그는 파업에 참여하게 된 이유를 들려줬다.
서울메트로는 지난 1월 2010년까지 총인원의 20.3%인 2천88명을 줄이는 것을 뼈대로 ‘창의 혁신프로젝트’를 발표하고 이를 추진해왔다. 회사는 “천문학적 적자를 줄이려면 인력감축과 외주화 등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실제 지난 6월말 현재 서울메트로의 누적적자는 5조4500억원에 이른다.
회사의 구조조정 방침은 노동조합의 반발을 불렀다. 회사가 기관사 36명을 외주업체로 이직하는 방침을 단행하면서 노사간 갈등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회사는 퇴직 기관사 75명을 외주업체에 이직을 권고했고, 이중 36명이 이직을 택했다. 그러나 노조는 “노조와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추진한 인력 구조조정”이라며 반발했다.
회사는 5월에도 직원 311명을 서비스지원단에 발령했다. 노조는 “퇴직 예정자와 병가를 많이 쓴 사람, 노조 간부들을 골라 강제 발령했다”며 “서비스지원단은 사실상 퇴직 전 단계의 구조조정 차원”이라고 규정했다. 인력 구조조정을 놓고 양쪽의 신뢰는 금이 갔다. 눈앞에서 진행되는 구조조정을 놓고 윤씨는 “하루하루가 불안해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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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 전날인 19일 저녁 6시께 서울역의 풍경. 외부의 곱지 않은 시선, 정권과 회사 쪽의 엄단 방침 등…위기 속에 파업 전야가 다가오고 있다. (촬영화면 캡처. 김도성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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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에겐 미안…즐겁게 일만 할 수 있다면”
회사생활 15년차. 윤씨에게 서울메트로는 애증이 교차하는 곳이다. 그의 가장 큰 불만은 ‘사람답게 은퇴할 수 없게 변해버린 직장’이었다. 나이 들 때까지 열심히 일한 뒤 뿌듯하게 은퇴하고 싶은데 쫓겨나듯 회사를 떠나는 선배 기관사들의 모습은 자신의 미래이기도 하다.
“20년, 30년씩 근무한 선배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떠났어요. 왜 축하 받아야 할 사람들이 저렇게 나가야 하는지 참 속상했죠. 나에게도 곧 닥칠 일 같아 보기 안쓰러웠습니다. 월급을 많이 올려주지 않아도 좋으니 즐겁게 일만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열차가 합정역을 지나 긴 터널을 빠져나왔다. 탁 트인 한강이 눈에 들어온다. 윤씨는 기관사로 처음 열차를 운전하던 때를 잊지 못했다. “정말 좋았죠.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도 몰랐어요. 내가 삼사천 명의 사람들을 태우고 운전을 한다는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친구들한테 자랑도 많이 했어요.” 윤씨는 “그런 자부심으로 10여년을 보냈다”고 말했다.
오후 3시10분. 열차는 2호선 구간을 한 바퀴 돌아 다시 동대문운동장역에 도착했다. 새벽 6시부터 시작된 윤씨의 하루 업무는 이것으로 끝이었다. 그는 퇴근 뒤 파업 전야제가 예정된 군자차량기지로 향했다. 갑자기 찾아온 한파로 칼바람이 불었다. 붉은 머리띠를 두른 조합원들은 쉴새없이 파업투쟁가를 이어 불렀다. 시간은 새벽으로 치닫고 있었다. 같은 시간 노사협상의 마지막 줄다리기도 팽팽하게 계속되고 있었다. 윤씨는 파업에 기꺼이 동의했으나 노사협상에 대한 기대를 끝까지 버리지 않고 있었다.
“시민들에게는 미안하죠. 아무래도 불편하니까요. 그래서 부디 파업까지는 안가고 대화로 잘 풀었으면 좋겠어요.”
그날 새벽 윤씨의 바람처럼 노사는 극적인 합의를 이끌어내며, 파업은 면했다. 그러나 알맹이가 없었다. 노사합의를 이끌어 내고도 조합원들의 표정이 밝지 못했다. 노사합의문은 “노사 합의에 의해 문제를 해결한다”는 원칙만 합의한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다음날 출근길에 윤씨를 다시 만났다. 윤씨도 아쉬운 표정이었다. “변한 건 없는 것 같아요. 그래도 파업까지는 안 가서 다행이네요.” 그에게 더 원하는 것은 없는지 물었다. “사람답게 은퇴할 수 있는 직장이 되면 좋겠어요.”
윤씨가 다시 기관실에 앉았다. 그리고 열차는 경적을 울리며 승강장을 빠져나갔다. 윤씨와 열차는 다시 어두운 터널 속으로 향하고 있었다.
허재현 기자
cataluni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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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차량기지에서 열린 파업전야제에 참석한 윤상구씨. 붉은 머리띠, 깃발, 구호…언제부터 ‘투쟁’이라는 말에 익숙해 졌을까? (촬영화면 캡처. 김도성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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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워진 경제 상황 부담…노사 합의 만족스럽진 않아” [인터뷰]김영후 서울메트로 노조위원장
서울메트로 노사합의가 타결된 뒤 김영후 노동조합 위원장은 “필수업무 인원을 유지해 합법적인 투쟁을 하려 했으나 어려워진 경제 상황이 협상 과정에서 부담이 됐던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서울메트로 노사합의와 관련해 어려운 경제상황과 정부의 불법파업 압박 등으로 외주화 등 민감한 쟁점들을 협의하는 수준에서 타결해 ‘어정쩡한 봉합’을 했다는 평가를 인정한 셈이다.
김 위원장은 21일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노사합의 내용에 만족스럽지 못하지만 지하철 이용시민에게 불편을 끼치지 않으려고 양보했다”며 “조합원의 인준 투표를 겸허하게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아래는 김 위원장과의 일문일답.
-불법파업 논란이 뜨거웠다. 이를 어떻게 보나?
=불법이란 말은 정부의 협박에 불과하다. 우리는 필수업무 인원을 유지해 합법적인 투쟁을 하려 했다.
-노사 합의 내용은 만족하나?
=만족스럽진 못하다. 하지만 지하철을 이용하는 시민들의 불편을 끼치지 않으려고 양보할 것은 양보해야 했다. 조합원들의 인준 투표를 겸허하게 기다리겠다.
-앞으로 외주화 문제는 노사 협의로 추진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원래 외주화 철회가 목표 아니었나?
=외주화를 철회하려고 법원에 분사(조건부 민간위탁) 중지 가처분신청을 냈지만, 재판부는 기각·각하 판결을 내렸다. 외주화 계획은 회사의 경영권 행사로 인정을 해버린 것이다. 이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처지가 있었다.
-서울메트로는 2010년까지 2천88명을 감축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단협 20조 3항에 ‘공사는 불가피한 경우에도 강제 퇴출을 전제로 한 구조조정을 하지 않는다’고 돼 있다. 일방적으로 노동자들이 감원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정년퇴직 등 자연감소 하는 형식으로 인력을 감축할 것으로 보고 있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징계당한 사람들은 회사가 선처하도록 노력한다고 합의했다. 그런데 이는 선언적 수준에 불과한 합의 아닌가?
=징계자 중에는 해임자가 있고 직위 해제자가 있다. 해임자의 경우 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 신청을 냈지만, 기각당한 경우도 있고 승소한 경우도 있다. 앞으로 중앙노동위원회에 또 구제신청을 할 것인데 ‘노력하겠다’는 회사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재판 과정에서 노조가 유리할 것으로 본다.
-필수유지사업장으로 분류되면서 파업 동력이 많이 떨어졌다는 지적도 있다.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려워진 경제 상황이 협상 과정에서 부담이 됐던 것은 사실이다.
-불법파업 논란이 뜨거웠다. 이를 어떻게 보나?
=불법이란 말은 정부의 협박에 불과하다. 우리는 필수업무 인원을 유지해 합법적인 투쟁을 하려 했다.
-앞으로 회사와 어떻게 협상할 것인가?
=일단 지금은 큰 틀에서만 합의가 이뤄진 상태다. 12월 첫째 주에 인준투표 후 가결이 되면, 그 후엔 노사협의를 통해 세부적인 논의를 계속해 나갈 것이다. 허재현기자cataluni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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