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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12.04 17:07 수정 : 2008.12.04 17:58

울산 미포조선 앞에서 지난 11월26일 열린 촛불문화제. 미행(美行) 제공

[‘미행’이 만난 비정규직 노동자들] ② 현대미포조선
정치적 사안에 소극적 강성노조, ‘공룡처럼 멸종’
‘노조의 보수화’ 탈피 해야 비정규직 문제 해결도

이 기사는 ‘비정규직철폐를위한 미디어행동네트워크’ <미행(美行)>의 첫번째 프로젝트인 지역순회 사업 ‘미디어게릴라들이 비정규노동자들을 만나다’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미행>은 블로거와 인터넷TV팀, 작가와 만화가, 언론인 등 다양한 미디어 생산자들이 함께 모여 비정규 노동의 현실을 고민하고 해결을 모색하는 프로젝트팀입니다. 편집자주

2008년 11월 23일 새벽 울산에 도착했다. 일과가 끝나고 황급히 짐을 챙겨 나선 길이었다. 고속도로를 따라 내려가면서 잡감들이 서로 교차했다. 오랜 시간을 지나 다시 찾는 울산. 주마등처럼 과거의 기억들이 차량의 불빛으로 얼룩지는 차장을 따라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울산은 학창시절 이른바 노동자지원투쟁을 위해 자주 찾던 곳이었다. 그래서 익숙한 만큼 잊을 수 없는 기억도 많이 간직하고 있는 도시였다. 하지만 그동안 내가 감당한 변화 못지않게 울산의 풍경도 변해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기에 울산행을 감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울산은 울산이었다. 변하긴 변했으되, 새롭고 낯선 이미지 사이로 마치 기시감처럼 익숙한 광경들이 내 앞에 펼쳐졌다. 익숙한 공업탑을 돌아드는 순간, 나에게 울산은 과거의 기억을 헤집고 말간 얼굴로 나타났다.

현대차노조 비정규직 외면는 정규직 입지 좁히는 길

잠깐 눈을 붙인 뒤에 찾아간 곳은 ‘출근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미포조선. 그랬다. 나는 과거의 기억이나 되새김질하려고 울산을 찾은 건 아니었다. 울산을 찾은 까닭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복직을 요구하며 4층 건물에서 목에 밧줄을 매고 투신한 이홍우씨 때문이었다. 다행히 이씨는 중상을 입긴 했지만 생명은 건질 수 있었다. 확실히 이씨의 투신은 정규직 노동자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항의한 사건이었고, 이건 얼마 전 전국금속노동조합 현대자동차지부가 비정규직 노동자의 노조 직가입안을 부결시킨 것과 묘하게 대조를 이루는 일이었다.

도대체 울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내가 울산행을 결심한 건 이런 의문을 해소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현대자동차 노조가 비정규직 노동자의 노조가입을 수용하지 않고 저임금과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처지를 외면했다는 비판은 ‘귀족노조’라는 울산지역 노동운동에 대한 세간의 편견과 결합하면서 대기업 노조의 정치적 입지를 더욱 좁혔던 게 사실이다. 대기업 노동조합이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는 존재로 신뢰받기는 고사하고 자기의 기득권을 지키기에 급급한 이익집단으로 비쳐지고 있는 현실은 이번 ‘증거’로 인해 더욱 공고해졌다고 하겠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홍우씨의 투신은 현대자동차 노조를 비롯한 대기업 노조의 위기를 온몸으로 막아보기 위한 단말마 같은 몸부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치고 지나갔다. 내 예상은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제법 쌀쌀한 아침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지는 노동가요의 음색은 80년대 풍으로 출근길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피켓에 적힌 “~을 살려내라”는 문장구조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었다. 노래와 구호는 절박한 내용을 전하고 있었지만, 출근하는 노동자들의 표정은 전혀 절박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울산하면 떠올리는 오토바이 출근행렬은 여전했지만, 그렇게 예전처럼 장엄하진 않았다. 치솟은 유가 때문인지 대부분 스쿠터였고,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노동자들도 많았다.

용인기업 해고노동자들이 11월26일 오전 울산시 해안도로 삼거리에서 원직복직을 요구하는 출근길 선전전을 벌이고 있다. 미행(美行) 제공

병상의 이홍우 조합원이 미행팀의 방문에 힘겹게 필담으로 답하고 있다. 미행(美行) 제공

아침 선전전의 목적은 이홍우씨 사건의 의미를 알리고 이를 계기로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 정규직 노동자들의 관심을 이끌어내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분위기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 보였다. 마이크를 잡은 사회자가 지지를 호소하기 위해 오토바이 경적을 울려줄 것을 요청했지만 화답해주는 이들은 없었다. 나중에 한 관계자는 이런 묵묵부답에 대해 무관심이라기보다 회사 측으로부터 불이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취하는 자기보호본능이라는 분석을 내놓았지만, 그때 받은 인상은 확실히 울산에 대한 이미지를 재고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보수언론이 주장하고, 정부 측에서 말하는 것과 달리, 울산에 있는 노조는 그렇게 강한 노조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현대자동차 노조가 비정규직 직가입안을 부결시킨 건 바깥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강성노조’가 자기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기 위해 기득권을 행사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정치적인 사안을 밀어붙일 만큼 노조가 강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울산에 강성노조 따위는 없는 것이다. 아니 한국의 노동운동에서 ‘국민’ 대다수가 상상하고 있는 그 노동조합 같은 건 이미 공룡처럼 멸종해버렸다. 서울에 모여 빨간 띠를 두르고 구호를 외치는 그 ‘강한’ 노동자들은 서울이라는 집약적 대도시 공간에서 특별히 도드라져 보이는 착시현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노동운동의 메카’ 울산에 더 이상 강성노조 없어

이후 일정에서 나는 이 가설을 증명할 만한 증거를 찾아보기로 했다. 아침을 먹은 뒤 이동한 곳은 이홍우씨 투쟁대책위원회 농성장. 장소는 미포조선 앞에 있는 버스정류장이었다. 비닐천막과 스티로폼이 만들어내는 익숙한 풍경이었다. 한창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는데, 들이닥친 울산 동구청 교통행정과 철거반원들은 이런 익숙한 느낌에 한 꺼풀 더 현실감을 입혀줬다. 철거반원들만 온 게 아니었다. 경찰들과 정보과 형사들도 천막농성장을 뜯어내기 위해 출동했다. 복층으로 만들어진 주차장에서 농성장을 내려다보면서 정보과 형사인 것 같은 인물이 커다란 캐넌 카메라로 얼굴 채증을 하고 있었다. 그 옆에서 현대마크가 박힌 점퍼를 입은 두 인물도 백통 렌즈를 장착한 카메라를 들고 연신 셔터를 눌러대고 있었다.

무슨 큰 사정이라도 봐주듯이, 경찰이 다가와서 인터뷰가 끝날 때까지 취재차량을 견인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경찰과 검은 재킷을 입은 철거반원, 그리고 부지런히 사진을 찍는 정보과 형사들에 둘러싸여서 인터뷰를 진행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인터뷰의 내용은 “도대체 울산이 왜 이렇게 되었는가?”하는 외부자의 질문에 대해 노조 관계자들의 즉답을 들어보는 것이었다. 수많은 얘기들이 오고갔지만, 크게 정리를 하자면 이렇다. 첫째,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울산은 더 이상 노동운동의 메카라고 불릴 수 없는 상황이다. 노동조합의 지도력이 많이 약해졌다. 둘째, 노조는 있지만 이른바 민주노조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비정규직 직가입안 부결이 이런 현실을 잘 보여준다. 셋째, 회사 측의 통제와 압박이 전례 없이 과감해졌다. 이명박 정부의 출범 이후 이런 현상이 더욱 노골화했고, 이를 제지할 만한 저항력을 노조가 갖추지 못하고 있다. 종합해보니 결국 처음에 품었던 가설을 재확인해주는 의견들이었다.

그러나 정작 이런 문제가 발생한 원인에 대한 정확한 진단은 나오지 않았다. 어떤 이는 “나태해진 노조 간부의 기강”에서 그 원인을 찾았고, 어떤 이는 예전보다 더 ‘야만적’으로 바뀐 회사의 탄압수위를 거론했다. 타당한 지적이긴 했지만, 여전히 피상적인 상황 기술에 머무는 감이 있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외부인에 불과한 내가 인터뷰 몇 번으로 문제의 본질을 완전히 파악한다는 건 어려운 일일 것이다. 이런 한계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이들을 인터뷰하면서 현재의 상황을 초래한 원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들은 나름대로 가닥을 잡아나갔다. 인터뷰를 마치고 농성장을 떠나려는 즈음에 동구청 교통행정과에서 나온 철거반원들이 철거를 시작하려고 했다. 몇 마디 고성이 오가고 비닐 천막을 걷는 선에서 타협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였는데, 이제는 길가에 걸어놓은 플래카드 철거 문제로 시비가 붙었다.

젊은 노동자 두 명이 플래카드를 치울 수 없다고 뻗대는 와중에, 울산 노동운동과 함께 잔뼈가 굵었다는 고참 노동자 한 명이 “소모적인 투쟁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자”고 스스로 플래카드를 철거해버리는 해프닝이 일어났다. 그 고참 노동자는 조금 전 인터뷰에서 노조 간부의 안이함을 질타했던 그 사람이었다. 사실 인터뷰 와중에 나온 회사 측의 현장통제에 대한 비판적 지적은 타당하다. 그러나 노조조차 없던 시절의 현장통제라는 건 지금보다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더 혹독한 조건에서도 굴하지 않고 노동조합의 기초를 닦았던 게 울산의 노동운동이었다. 앞서 지적했듯이, 문제는 강력한 회사 측의 탄압이라기보다 강한 노조가 없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방향은 정해졌다. 강성 노조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원인이 무엇인지 궁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경찰과 구청직원들이 미포조선 버스정류장 앞에 설치한 이홍우씨 투쟁대책위원회 농성장에 나타나 천막과 펼침천 등을 철거할 것을 요구하면서 농성중인 조합원들과 말싸움을 벌이고 있다. 미행(美行) 제공

‘사용자는 미포조선’ 대법 판결에 해고자들 “원직복직”

이런 궁금증을 풀 수 있는 있는 실마리가 용인기업 해고노동자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드러났다. 용인기업 해고노동자들은 “전국금속노동조합울산지부 현대미포조선 용인기업지회”를 만들어서 복직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용인기업은 “21세기 마지막 내주하청업체”로 알려져 있는데, 내주하청의 조건이라는 건 신분상으로는 비정규직이었지만, 정규직과 동일한 처우와 임금을 받는 고용형태였다고 한다. 그러나 회사 측은 2003년 용인기업에게 외주전환을 요구했고 이를 수락하지 않자 작업물량을 주지 않은 채 시간을 끌다가 30명을 고스란히 해고해버렸다. 하지만 의문이 들었다. 회사 측이 무엇 때문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내주하청이라는 명목으로 묶어두었다가 2003년에 가서야 외주전환을 요구한 것일까?

처음에 선박 수리가 주 업무였던 미포조선이 선박 건조 위주로 생산라인을 재편하면서 고용구조를 변화시킬 필요성이 제기되었을 것이기에 회사 측이 용인기업에게 내주에서 외주로 전환할 것을 요구한 배경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굳이 나중에 논란이 될 것을 알면서도 내주하청이라는 특이한 고용형태를 유지한 건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에 대한 답이 인터뷰 중에 나왔다. 당시 내주하청은 숙련노동자를 미포조선에 묶어두기 위해 제시한 조건이었다. 물론 회사 측에서 본다면 유동인원이 워낙 많았기에 질 높고 안정적인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이런 고용형태를 만들어낸 것이기도 하겠지만, 당시 비정규직 숙련노동자의 임금이 정규직보다 훨씬 높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내주하청으로 고용함으로써 인건비 절약을 도모할 수 있는 유리한 점도 있었다고 한다.

말이 비정규직이지, 아무나 내주하청노동자가 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들은 시험까지 치르고 내주하청노동자가 되었고, 이런 정황을 참작해서 최근 대법원에서 용인기업노동자들을 미포조선의 “정식직원”으로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이들은 이런 법의 판결을 계기로 생계를 위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원직복직을 요구하며 모인 것이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건 이들의 요구사항이 이제 적법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회사 측을 향해 법을 준수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용인기업 노동자들의 문제의식을 구성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이들이 원하는 건 무엇보다도 ‘노동자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자존심의 회복이 ‘평등주의’의 실현과 관련 있다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 평등주의가 도달할 지점은 어디일까? 자신을 평범한 늙은 노동자라고 소개한 용인기업의 한 해고자는 지금 와서 바라는 게 복직을 통해 얻을 “안정적인 삶”이라고 말했다. “원래 있던 작업장에서 노동자로 복귀해서 편안하게 퇴직하고 싶다”는 이 늙은 노동자의 소원은 과연 이루어질 수 있을까? 이 노동자는 자신의 이름과 인적사항을 공개하지 말 것을 주문했는데, ‘투쟁하는 노동자’로 남들에게 비치고 싶지 않다는 게 그 이유였다. 상경투쟁 때 언론 인터뷰를 한번 했는데, 그때 이름이 알려져서 그 이후로 가족들이 언론과 인터뷰하는 걸 탐탁하지 않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비슷한 문제를 다른 노동자들도 안고 있었다. 해고 이후 생계를 위해 다른 직장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용인기업 노동자들이 복직투쟁을 위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다고 했을 때 가족의 반대 또한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천막 농성장에서 인터뷰를 벌이는 조합원들 뒤로 ‘행복한 가정 안정된 직장 우리 모두의 바람입니다’라고 적힌 미포조선의 기업광고가 어색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미행(美行) 제공

배우자·자식 떠밀어 활동 탄압…20여년전과 똑같아

역시 문제는 가족이었다. 특히 울산의 노동운동에서 발견할 수 있는 특이한 점이 이 문제인 것처럼 보였다. ‘현대왕국’이라고 할 울산에서 일하는 노동자 가족은 맞벌이를 하는 경우가 드물다고 하는데, 이런 측면이 최근 벌어지고 있는 노동조합의 무기력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때 노동운동의 메카라고 불렸던 울산의 침체는 노동조합의 보수화와 무관하지 않다. 노조가 있긴 있지만 정규직 노동자의 이해관계를 넘어선 범위까지 문제의식을 확장할 수 없는 한계가 바로 이런 보수화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문제는 비정규직에 대한 정규직 노동자의 태도와 관련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서, “경영위기가 닥치면 경영진이 고임금의 정규직을 먼저 해고한다”는 경고는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는 말을 달리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홍우씨 투신 대책회의가 개최한 촛불집회에서 이런 취지의 발언이 다시 나왔을 때, 나는 착잡한 심정에 휩싸였다.

결국 한국의 노동현실에서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고용의 안정성이라는 건 사상누각 같은 것이다. 전 세계 금융위기 이후 한국에 닥쳐올 자본의 재편구도는 정규직의 비정규직화에 더 힘을 실으면 실었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동의할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울산의 상황은 이런 거시적 관점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핵심은 투쟁하지 않는 노동자들의 모습이었다. 이들은 여전히 “법을 준수하지 않는 비도덕적인 회사”와 “법을 지키면서 정당한 요구를 하는 노동자들”이라는 선악의 이분법을 고수하고 있었다. 이런 현실인식은 울산 바깥, 또는 현대노조 외부에 있는 ‘국민’의 생각과 너무도 다른 것이다. 법이 만들어놓은 테두리 너머를 상상하지 못하고 그 한계 내에서 권리를 ‘요구’하겠다는 태도는 뿌리 깊은 가족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는 노동운동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닐까? 비정규직 노동자의 복직이 “자식들을 좋은 학원에 보내, 좋은 대학에 진학시키고 싶은 희망” 때문에 이루어져야만 하는 건 아닐 테다. 자신의 분신이라고 할 자식을 노동자가 아니라 중간계급으로 키워내고 싶은 노동자의 소망은 무엇을 말해주는 걸까? 노동운동을 통해 ‘다른’ 세상을 열어낼 수 없는 현실이 이런 방식으로 노동자의 유토피아 충동을 자본주의적 욕망 구조에 묶어두고 있는 건 아닐까?

가족이데올로기에 매여 있는 한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자본의 현장통제를 무력화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다. 증언에 따르면 회사 측은 노조활동에 참여하는 노동자들의 신상을 파악한 뒤에 가족에게 연락하고, 당신 아들 또는 남편이 불순한 활동을 해 직장에서 해고당할 수도 있다는 식으로 협박해서 노조활동을 막아왔다고 한다. 7-80년대 학생운동을 탄압하던 방식이 여전히 21세기에 고스란히 노동현장통제의 기술로 잔존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운동이 가족주의를 탈피하지 못하는 한 이런 ‘사회적 통념’에 근거한 통제의 방식은 여전히 유효할 수밖에 없다.

[관련 영상] ‘미행’ 현대미포조선편 <영상제공: 칼라TV>

[관련 음성파일] 비정규직 문제로 투신한 이홍우씨의 육성

상식과 달리 “헐벗은 자”일수록 법의 지배에 고스란히 노출되어서, 오히려 더욱 강력한 법의 지지자로 태어난다. 노동현장 또한 마찬가지인 것이다. 아래로 갈수록 가족이데올로기는 더욱 강고하고, 가부장제적 지배시스템은 훨씬 견고하다. 한국의 사회운동이 필연적으로 ‘젠더’와 조우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 이 때문이다.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머리를 맞대야할 시점이 왔다. 지금 당면하고 있는 현실은 분명 자본의 입장에서도 위기이다. 이 위기의 국면에 어떻게 노동운동이 대처하는가에 따라서 앞으로 한국 사회 구성원들이 살아가야할 미래의 모습이 달라질 것이다. 비정규직 철폐 투쟁이 말 그대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라는 기획에 머물기만 한다면,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자기 패배’를 미리 상정하는 일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우리가 무력화시켜야하는 건 정규직은 정상노동이고 비정규직은 비정상노동이라는 법의 논리이고, 이런 논리체계를 그대로 체현하고 있는 사회적 통념이다. 문제는 비정규직이라는 고용의 형태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주체화 방식이다. 비정규직 투쟁이 새로운 주체화의 경로를 만들어내는 ‘사건’일수 있을지, 앞으로 다가올 몇 년 사이에 판가름 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돌아오는 새벽 내내 나는 잠들지 못했다. 이택광 경희대 영문학과 교수(문화비평가)


※ 글쓴이 이택광 교수는 문화평론가로 영국 워릭대학에서 철학을, 셰필드대학에서 문화이론을 공부했다. 지금은 경희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문화연구를 가르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중세의 가을에서 거닐다>, <근대 그림 속을 거닐다>, <민족, 한국 문화의 숭고대상>, <한국 문화의 음란한 판타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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