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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수 2000 그래프 ‘보물 모시듯’…폭락 날 노래방서 ‘몸 날리기’
펀드 반토막에 고객·친구 원성…“끝없이 추락하는 롤러코스터”
장윤정의 ‘어머나’, 강진의 ‘땡벌’, 지점장님이 좋아하는 엄정화의 ‘포이즌’….
한국투자증권 영업사원 유진주(25)씨의 수첩에는 ‘분위기 띄우는 노래’ 목록이 빽빽이 적혀 있다. 포털 사이트를 일일이 검색해 선별한 특별 리스트다. 장이 폭락한 날이면, 노래방에서 선배들의 꿀꿀한 기분을 풀어주는 게 팀 내 유일한 신입사원이자 막내인 유씨의 몫이기 때문이다. 입사 이후 그는 숱한 날을 노래방에서 “몸을 날렸다”. “주가가 떨어질 때마다 선배들은 전전긍긍하는데 신입사원으로서 할 일이 별로 없더라고요. 노래방에서 분위기라도 띄워야 조금이라도 활력을 찾을 수 있겠다 싶었죠.”
코스피지수가 2000을 찍은 지난해 말 서울 여의도 증권가에 취직한 ‘입사 2년차’들한테 올해는 ‘끝없는 추락’의 연속이었다. 지수는 불과 1년 만에 반토막이 났다. 이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롤러코스터를 탔는 데 급한 내리막 코스만 타고 온 느낌”이라고 토로했다. 미래에셋증권 이용전(28)씨는 지난해 입사 직후 2000을 뚫고 올라간 코스피지수 그래프를 캡처해 지금도 “보물 모시듯” 저장해두고 있다. 이씨는 “주변에서 ‘좋을 때 잘 취직했다’며 부러워했는데 상황이 이렇게 급변할 줄 누가 알았겠느냐“고 말했다.
주가폭락으로 일거리, 공붓거리는 나날이 늘었고, 선배들의 ‘예민 지수’는 갈수록 높아졌다. 대우증권 투자분석부 추연환(28)씨는 매일 아침 증시 뉴스 등을 정리한 ‘모닝브리핑’을 만든다. 추씨는 “입사 초 장이 좋았을 땐 브리핑에 오타나 실수가 있어도 그냥 ‘조심하라’며 넘어갔는데 요즘은 혼쭐이 난다”며 “더 일찍 출근해 꼼꼼히 보게 된다”고 말했다.
친구들의 원성에도 이력이 났다. 자신들이 추천해 펀드 등에 가입한 친구들이 수시로 ‘어떻게 되는 거냐’며 물어오기 때문이다.
미래에셋 이씨는 “대부분 사회 초년생이기에 ‘일찍 이런 일을 경험한 게 어쩌면 다행’이라고 설득하면 이해해준다”고 말했다. 고객들의 항의는 더 죽을 맛이다. ‘들어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왜 들어갔느냐’ ‘당신이 하라는 대로 했는데 어떻게 된 거냐’는 등의 항의 전화에 쩔쩔매다 보면 하루가 훌쩍 지나가기 일쑤였다.
대우증권 추씨는 지난해 100명의 동기와 함께 입사했다. 다음주에 들어올 예정인 올 신입사원은 30명이 채 못된다. 한투증권 유씨의 입사 동기는 140명이지만, 후배 신입사원들은 절반인 70여명에 불과하다. 신입사원들을 위한 스키 캠프나 대규모 환영식을 열어주던 분위기도 싹 사라졌다. 유씨는 “동기들끼리 ‘우리 땐 장이 좋아 많이 뽑혔는데 밥값만 축내는 게 아니냐’는 농을 한다”고 말했다. 추씨는 “코스피지수가 2000을 뚫고 올라간 ‘캡처 화면’을 다시 저장하게 되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송경화 기자 freehw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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