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3.12 16:08
수정 : 2009.03.13 00:44
[한겨레다큐 ‘한큐’] 고용지원센터 ‘창’에 비친 얼굴들
13개 창구마다 북새통 “이런 경험은 처음”
막일마저 끊겨 “아들 생각하면 잠이 안와”
한겨레 시사다큐 <한큐>가 다시 ‘큐!’했습니다. <한큐>는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는 뉴스의 현장과 진솔한 삶의 현장으로 카메라가 출동합니다. ‘사회와 사람’이 묻어나는 영상으로 우리들의 ‘오늘’을 요모조모, 촘촘하게 비춰드리겠습니다. <한큐>는 다음 회부터는 격주 목요일 10시 <인터넷한겨레>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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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지원센터에서 매일 두 차례 열리는 실업급여 수급 설명회는 올해 들어 항상 만원이다. 영상캡처. 김도성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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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눠 드린 서류를 천천히 설명할테니 그대로 따라 오시면 됩니다. 못 좇아 온다고 걱정하지 마세요. 대학 나오신 분들은 전공 표시하시고요. 휴대전화 번호도 적어주세요.”
서울 노원구 북부종합고용지원센터의 수급자 설명회장. 실업급여 상담 강사의 따발총 같은 말이 설명회장 안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100여 평 남짓한 강당을 가득 메운 실업급여 신청자들은 숨을 죽인 채 강사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입을 굳게 다문 채 한참 동안 고개를 서류 속에 파묻고 있던 신청자들은 강사의 말이 끝날 때까지 질문 한번 하지 않았다. 강연장에는 그렇게 무거운 공기가 내려 앉아 있었다.
“실업급여 수급 자격이 없다”는 말에 한숨만
설명회를 마치고 나온 김광섭(38·서울시 강북구 미아동)씨의 표정은 어두웠다. 김씨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냐고 물었더니, “아직 잘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하수도 보수공사 일을 하다 지난 해 8월 그만 둔 김씨는 6개월 넘게 실업 상태인 자신의 처지가 답답할뿐이다. 김씨는 “막일이라도 좋다”며 하수도 일에 뛰어들었으나 이 마저도 일감이 떨어져 지금은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나서야 할 처지다. 하지만 그의 절박한 일자리 요청에 돌아오는 응답은 없다. 중학교 2학년 아들을 둔 김씨는 “아들만 생각하면 잠이 안 온다”고 토로했다.
김씨는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권고사직 형태로 퇴사해 실업급여라도 받아 생계를 꾸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용지원센터를 찾은 윤보근(38)씨는 “실업급여 수급 자격이 없다”는 설명을 듣고 발걸음을 돌렸다. 윤씨는 “택시회사에 내야하는 사납금을 견딜 수 없어 할 수 없이 일을 그만뒀는데, 자발적으로 그만둔 것이라 실업급여 수급자격이 안된다고 하더라”며 한숨을 쉬었다. 실업급여는 고용보험 가입 기간이 180일 이상인 근로자가 폐업·정리해고 등으로 불가피하게 퇴직한 경우에 한해 정부가 이전 임금의 절반을 최장 6개월간 지급하는 제도다. 윤씨같은 ‘자발적 퇴사자’로 분류되는 사람들은 실업급여를 받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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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회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는 김광섭씨와 윤보근씨. 두 사람은 하수구 보수 노동자였으나 실직한 후 실업급여를 신청하러 왔다. 영상캡처. 김도성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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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50인데…” 취업교육 ‘지푸라기’도 남의 일
미국 월가의 ‘금융쇼크’의 여파로 지난 해부터 본격화된 실물경제 침체가 빠르게 확산되면서 실업자 수는 크게 늘고 있다. ‘고용 빙하기’란 말은 은유적 표현이 아니라 현실이다. 1월 실업자 수만 84만8000명으로 지난해 1월과 비교해 7만3000명이 증가했다. 실업자 수가 폭증하면서 고용지원센터를 찾아 실업급여를 신청하는 사람들도 사상 최고 기록을 세웠다. 노동부가 밝힌 실업급여 신청건수는 지난해 11월 6만6247건에서 올해 1월 12만8073건으로 2배나 늘었다. 전국 85곳의 고용지원센터는 밀려드는 수급 신청자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전국에서 실업급여 신청자가 가장 많은 곳은 서울 북부 고용지원센터. 이곳은 현재 밀려드는 수급 신청자들로 정상적인 업무가 어려울 정도다. 상담 창구 13곳은 밀려드는 민원인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이진호 운영지원팀장은 “평소 600-800명 정도가 센터를 찾는데 지난 2월초에는 1200명이 넘게 찾아온 적이 있었다”며 “상담사 한명이 하루 30~40건 정도의 실업급여 상담을 해야 하는데 최근엔 60~75건 정도를 처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팀장은 “지금까지 일하면서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이렇게 고용지원센터를 찾는 사람들이 크게 늘면서 상담의 질이 떨어지지 않을까 우려된다. 새로운 일자리를 찾으려면 충분한 상담을 받아야 하지만 최근엔 상담직원과 5분이상 이야기 나누기도 힘들다. 오태준 강남고용지원센터 운영지원팀장은 “작년 11월부터 방문자가 크게 늘어 담당 직원들이 힘들어 하고 있다”고 말했다.
취업상담 후에도 별 성과가 없는 구직자들은 센터를 나서며 문 앞에 놓여 있는 취업교육 홍보자료를 들춰보지만 어깨만 더 쳐질뿐다. “내 나이가 50인데 취업 교육을 6개월 이상 받으면 뭐하겠어요. 그리고 교육기간 6개월 동안은 또 뭘 먹고 살아야 하고요.” 한 남성 구직자(50)가 하소연했다. 그는 “이런 교육 받아도 취업할 가능성은 1%도 안된다”고 잘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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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북부종합고용지원센터 수급자격 상담장에서 실업급여 신청자들이 상담을 받고 있다. 영상캡처. 김도성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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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업·휴직으로 고용유지지원금 받는 기업 18배 늘어
“취업교육을 받아도 취업할 데가 없다”는 구직자들의 한숨은 빈말이 아니다. 이진호 북부고용지원센터 운영지원팀장은 “우리 지역엔 10인 이하 영세 사업장이 90%가 넘어 기업이라고 할 만한 게 없다”며 “취업을 알선할 만한 곳이 없어 답답하다”고 말했다.
기업들의 구인능력이 갈수록 떨어지는 것은 좀 더 심각하고 근원적인 문제다. 북부고용지원센터에 기업들이 요구한 구인 인원수는 지난해 1분기 2449명에서 4분기에는 1640명으로 크게 줄었다. 강남고용지원센터의 지난 해 11월~올해 1월까지 구인 인원수도 각각 5114명, 2680명, 2232명으로 3개월 연속 줄고 있는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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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업급여 신청자수 변화. 김도성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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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들의 고용능력이 좋아질 희망도 없어 보인다. 노동부가 발표한 ‘고용유지지원금 통계’는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경영상황이 나빠진 업체가 해고 대신 휴업이나 휴직을 활용하면 정부가 휴직수당을 지급하는 고용유지지원금의 집행건수가 빠르게 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11월 380건(31억원)이던 고용유지지원금 집행건수는 불과 3개월만인 올 2월엔 5,205건(296억원)까지 늘었다. 2008년 같은 기간 287건(33억원)이 집행된 것에 비하면 18 배 가량 는 것이다. 95년 통계 작성 이래 최고 수준이다.
고욕능력이 떨어진 기업들은 가장 먼저 비정규직부터 정리에 나서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부고용지원센터에서 만난 박아무개씨는 “경제가 어려워지자 나같은 비정규직부터 해고하더라”고 하소연했다. “한 백화점 채권부에서 파견직으로 일했어요. 그런데 정규직으로 일하던 분들을 해고할 수 없어 채권부에 발령내야 한다며 저더러 그만두라고 하더라고요. 2년 짜리 비정규직은 정말 같은 일을 하면서도 이렇게 억울한 일을 당합니다.”
“보험 다 깨도 빈털터리, 죽기 일보직전” 먹구름만 잔뜩
“들었던 보험도 다 깨고 이제 빈털터리예요. 식구들한테 미안해서 노숙이라도 해야할 것 같아요. 죽기 일보직전입니다.”
주름살이 깊게 패인 한 50대 구직자가 북부고용지원센터에서 실업급여 수급자격을 상담한 뒤 힘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부동산 중개업을 하던 그는 지난해 6월부터 실업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자영업인 부동산 매매업을 했기 때문에 지원대상이 아니다.
이렇게 폐업한 영세자영업자들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고용지원센터에 들렀다 발길을 돌리고 있다. 정부가 최근 ‘휴·폐업한 자영업자들에게도 실업수당 성격의 지원금을 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생계가 어려워진 자영업자들이 ‘혹시나’ 하고 들러보는 것이다.
다행히 정부가 법 개정을 서둘러 올해 하반기부터 자영업자들도 고용보험 가입이 시작될 것으로 예상된다. 노동부는 관계부처 협의를 거쳐 4월 임시국회에 법안을 제출하고, 시행령 개정과 전산시스템 구축에 돌입하기로 했다. 그러나 하반기 자영업자가 고용보험에 가입하더라도 이미 파산한 자영업자를 구제할 길은 막막하다.
해가 질 무렵 취업상담을 마친 김철규(가명·59세)씨가 북부고용지원센터를 나서고 있었다. 온도계를 만드는 회사에서 19년이나 일했던 김씨는 얼마전 정리해고를 당했다. 회사의 창립 멤버였지만 경제 한파에 그도 순식간에 실업자가 돼버렸다. “일주일 전에 사장이 부르더니 ‘미안하다’고 그러더라구요. 19년 일했는데 퇴직금으로 달랑 1천만원 받고 나왔습니다. 오죽했으면 그러겠느냐 싶었지만 죽고 싶더라고요.” 김씨는 나즈막한 목소리로 몇 마디 내뱉었다. 그리고 멍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선 햇볕 한줌 새어나오고 있지 않았다. 김씨는 기약없는 발걸음을 돌렸다.
글/ 허재현 기자
catalunia@hani.co.kr 연출·영상 김도성 피디
kds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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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김광섭씨는 하수구 보수 일이 냄새나고 힘들지만 그나마도 일이 없으니 어떻게 하냐며 한숨을 쉬었다. 영상캡처. 김도성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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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 일부 “지금은 경기 후퇴기가 아닌 공황 길목”
“단기 부양보다 고급 일자리·복지 예산 늘려야” 정부 정책 ‘부자 감세’ 치중 등 ‘역주행’ 비판도
실업자가 쏟아지고 문닫기 직전의 기업들도 속출하고 있다. “IMF 때보다 더 어렵다”는 비명이 빈말이 아니다. 금융시장만 벼랑에 서있는 게 아니다. 국내 경기 역시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식고 있다.
그래서 일부 경제학자들은 현재의 경제상황과 관련해 “우리 경제가 공황을 목전에 두고 있는 것 아니냐”며 조심스런 전망을 내놓는다. 국가 경제가 파탄 상태에 빠진 아이슬란드 같은 일부 국가들에 적용되던 ‘공황’이란 단어가 우리 경제상황을 분석할 때도 쓰이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인 김수행 성공회대 석좌교수는 가장 적극적으로 ‘경제 공황론’을 펴고 있다. 김 교수는 미국과 한국 경제의 연관성에 주목한다. 김 교수는 “미국 중앙은행이 돈을 풀면 기업이 유동성을 회복해 경기가 회복됐는데 2008년 3월부터는 돈을 풀어도 회복이 안된다”며 “우리도 비슷한 상황을 맞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아무리 달러를 풀어도) 환율이 오르고 주가가 폭락하고 실업자가 늘고 있는 지금의 현상은 우리 경제가 공황기에 접어들고 있는 특징을 보여준다”며 “이런 어려운 상황은 3~4년 동안 계속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정성진 경상대 경제학과 교수도 “기업들의 이윤율(투자 자본량 대비 이윤의 비율)이 한국 경제가 호황기였던 80년대 말에 비해 현재는 2/3 수준으로 떨어져 있다”며 “신자유주의 경제가 만들어낸 거품으로 간신히 버티던 국내 경제가 세계 경제의 침체와 함께 이제 공황기를 맞고 있다고 볼 수 있다”고 진단했다.
‘경제 공황론’은 학계에서뿐 아니라 정치권에서도 화두로 등장했다. 지난 달 26일 국회 귀빈식당에서 ‘세계공황과 한국경제’를 주제로 김수행 교수의 강연회가 열렸다. 이 강연회는 국회의원 연구모임인 ‘민주정책포럼’이 주최했는데, 이른 아침부터 국회의원들이 대거 참석해 관심을 보였다.
김 교수의 공황론과는 조금 차이가 있지만 국내 경제가 장기 침체에 빠질 것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IMF 당시 한국 경제가 급락 후 급등하는 ‘V자 형’ 경기회복 양상을 보였지만 지금의 침체는 급락한 뒤 횡보하는 ‘L자형’이 될 것이란 분석이 그것이다. 국회 예산정책처는 1일 “1997년 외환위기 당시에는 한국 경제가 ‘V자형’ 경기 양상을 보였으나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인 현재는 ‘L자형’이 예상된다”고 밝혔다.
이렇게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경제 위기가 ‘과거의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심각한 수준’이라는 분석은 “정부가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로 이어지고 있다. 대운하와 건설로 경기를 끌어올리는 일시적 경기 부양책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1930년대 세계 경제가 공황기의 터널을 지나던 때 사용했던 케인즈주의 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 교수는 “유효수요를 만들어 노동자들이 소비 여력을 키우고 내수를 진작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선 정부가 복지 예산을 늘리고 단순 노무직이 아닌 고급 일자리 창출에 힘써야 한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이 교수는 “정부의 정책이 유효 수요를 늘릴 수 있는 계급간 소득 재분배보다는 부자 감세 정책에 치우쳐 있어 오히려 거꾸로 가는 것 아닌가”라고 우려했다.
허재준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공황이 올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며 “사회 간접자본에 대한 투자를 늘리는 등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은 다 동원해 정부가 경기부양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안갯속 낭떨어지’ 위기에 직면한 우리 경제의 체질 개선을 위한 근본적인 처방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허재현기자catalunia@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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