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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3.18 13:29 수정 : 2009.03.18 13:29

최근 이명박 정권이 하는 실업/고용대책에 대해 말들이 많다.

인턴일자리나 사회적 일자리 등 이른바 제대로 된 일도 아니며 보수역시 형편없고 지원이 끊기면 일자리 자체가 없어진다는 이유로 이것들을 ‘허드렛일’이라 명명하는 것 같다. 사실 지금은 어느 나라든 일자리를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가가 최대의 국가정책과제이다.

우리나라도 2003년경부터 불거지기 시작한 근로빈곤층문제가 사람들에게 회자되기 시작했고 새로운 빈곤층으로 발견되어 사회문제화 되었다. 아무리 노동시장에서 일자리를 찾아 열심히 일해도 빈곤선 근처에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빈곤층이 발견되었고 이것이 사회문제로 인식된 것이다. 이렇듯 빈곤은 끊임없이 발견되고 재해석되며 어디서 빈곤선을 그어야 할지는 상당히 정치적인 문제가 되어 왔고 앞으로 더욱 그러할 것이다.

비정규직이나 허드렛일을 하는 저소득층, 알바만 하는 학졸무업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야 하고 이들이 간절히 원하는 것 역시 일자리다. 그런데 문제는 일자리가 아니라 ‘허드렛일자리’가 문제가 되고 있다.


이 문제를 생각하기에 앞서 전제가 필요하다. 상황인식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지금은 근로장려제세가 도입되고 사회적일자리나 사회적기업육성제도 등이 시행되고 있다. 이 같은 제도는 다름 아닌 저임금노동을 용인했기 때문에 도입된 것이며 저임금을 보충하려는 정책들이란 상황인식이 필요하다. 이 제도는 2005년 이후에 도입되었고 주로 차상위계층이나 근로빈곤층의 빈곤의 악순환을 좀 완화시켜보려는 정책들로 원래는 사회보장제도가 떠맡아 보호해야 할 대상들이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사회보장제도가 이들을 노동시장으로 떠밀고 있고 반대로 떠안은 노동시장은 점점 생활유지기능이 저하되고 있다. 다른 말로 질 낮은 일자리밖에 제공해 주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니 생활수준의 임금을 보장해 주었던 일자리(취업)는 갈수록 만들어내기 힘들어지고 빈곤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상황인식하에 지금까지의 정권은 노동시장에서의 저임금을 용인했지만 이를 사후적으로 보상(補償)하고 그나마 덜 괜찮은 일자리라도 계속해서 노동할 수 있는 정책들을 추진한 것이다. 이 자체를 나무랄 생각은 없다. 하긴 주위를 둘러봐도 이것은 세계적 경향이라 봐야 한다. 따라서 좋든 싫든 이 점을 먼저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같은 현실을 부정하면 논의가 진행될 수 없고 진행된다고 해도 사방팔방으로 왔다 갔다 하는 잡담과 가십이 될 것이다.

필자는 이전에 ‘허드렛일’에 안전망을 더해서 일자리를 제공하자고 제안한 적이 있다. 이것은 필자의 가치판단의 문제라기보다 저임금을 용인한 상태에서 이것을 보상하려는 각종 제도들과의 ‘정합성’을 고려한 현실인식에 의한 제안이었다. 종신고용을 통한 고용의 안전망을 기업이 더 이상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이상, 고용의 안전망의 불안전성을 사회가 보상하고 보장하여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며 이것은 당연한 권리주장이란 것이다(나아가 지금 진행되는 고용정책들은 임금에 대한 생활의존도에서 일부 일탈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하며 이를 장기적 가치판단 하에 기본소득 부분에 언급한 적이 있다)

따라서 ‘일자리=허드렛일+안전망’, 이렇게 정리한 이유는 이전 글(일자리=허드렛일+안전망 http://blog.hani.co.kr/aircheol/14619)을 참고하고 여기서는 ‘허드렛일’을 조금이나마 ‘제대로 된 일’로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 보충하는 의미에서 몇 자 적어보려 한다.

먼저 개념정리다. ‘허드렛일’이란 도대체 뭘 말하는 걸까?

일자체가 불안정하고 노동환경도 열악하며 임금 역시 낮은 일자리를 ‘허드렛일’이라고 하는 것 같다. 알다시피 이것은 이전부터 용인되어 왔다. 그 이유는 안정되고 작업환경이 좋으며 임금역시 괜찮은 일자리가 매우 제한되어 왔다는 것이다. 생산능력이 엄청나게 발전한 제조업도 더 이상 많은 고용을 만들지 못하게 되고 서비스업도 전문화 고도화되고 왔다. 그나마 고용여력이 있는 것이 보건/의료/복지 분야인데 이것들은 대체적으로 노동생산성이 낮고 아직 미정비 되어 있어 제대로 된 일자리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그럼 ‘허드렛일’의 반대편에 있는 ‘제대로 된 직장’, ‘제대로 된 일자리’는 뭘까?

‘제대로 된 직장’은 삼성 같은 대기업이나 공무원, 공사 등의 직장을 말하는 것일까? 안정되고 페이(pay)도 좋고 작업환경도 좋은 일들이라서 ‘제대로 된 일자리’라고 하는 것일지는 몰라도 어차피 이것들도 제대로 된 일자리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규격화된 일자리만이 제대로 된 일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또한 만들 수 있는 일자리도 한정적이다.

따라서 일자리가 제대로 되었다는 것은 정규직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비정규직이든 프리랜서든 뭐든 간에 자신이 종사는 일에서 제대로 된 지위 및 처우를 인정받고 제 권리를 행사하며 정규직과 같이 각종 사회적 위험에 처했을 경우 같은 수준의 보호와 보상과 보장을 받을 수 있으면 된다. 일(work)자체가 계속성을 갖고 정규직과의 차별 없는 대우와 조건, 그리고 일할 맛이 나며 자신의 능력향상이 가능하며 생활유지가 되는 것 일 것이다.

그럼 ‘허드렛일’을 ‘제대로 된 일’로 만들려면 뭐가 필요한가? 지금처럼 다 정규직으로 만들어야 하는가? 또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기라도 한 말인가?

이미 불(미)숙련 저임금노동자의 일자리가 ‘허드렛일’이란 것은 기획재정부나 노동부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저임금노동자의 규모가 아니다. 실업자와 반실업자, 청년실업자의 규모가 더욱 중요하다.

따라서 저임금노동, ‘허드렛일’이라도 많이 만들어내야 한다는 정책목표를 갖고 7-8년간에 걸쳐 추진해 왔던 것이다. 경제가 심각하니 실업대책을 추진하고 있고 실업대책은 그 자체가 일시적 대책일 수밖에 없으므로 당분간은 허드렛일 자체가 늘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인식은 중요하다. 특히 미조직된 청년실업자과 허드렛일자리에서 일하는 노동자에게 유리한 정책이 채용되도록 하는 방법을 우선적으로 생각하자는 말이다.

따라서 보는 각도를 바꿔보자는 말이다. 이렇게 말이다.

지금은 일(work)자체 만으로 ‘제대로(decent) 된 일’이라고 할 수 없으며 만들기도 어렵다. 따라서 ‘허드렛일’을 조금이라도 인간답게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일자리로 접근시키는 방법은 무얼까를 생각하여 여기에 요구를 집중하자는 말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안전망을 깔아 주는 것이다. 이것은 사용자와 정규직이 많은 부분을 부담하는 세금으로 할 수밖에 없다. 현실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노동환경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각종 노동법규를 개정하고 불법파견이나 위장도급 등의 강력한 노동행정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여기서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에 대한 요구가 중요하게 된다. 또한 최저임금이 이를 법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 그래야 ‘허드렛일’의 ‘질’이 더욱 악화되는 것을 막고 나아가 ‘허드렛일’의 ‘질’을 보다 향상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최근 노동부의 최저임금을 낮추겠다는 논의는 ‘허드렛일’만 만들겠다는 의도이지 이를 노동 관련법의 개정과 노동행정의 강화로 보충하겠다는 단 한마디의 코멘트도 없다는 점이 감독관청으로서 제일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일(work)이나 잡(job)자체가 생활안정을 의미하는 ‘자기완결성’은 갖는다는 생각은 이미 구시대적 발상일지 모른다. 즉, 일자리만 있다고 생활유지와 안정이 가능한 시대는 아니며 또한 ‘제대로 된 일자리’를 만들라는 요구는 가치판단으로는 타당하나 현실인식에서는 실현되기 어려워 보인다. 따라서 사회가 만든 불안정한 일자리, 그것이 가져오는 생활의 위협과 불안에 대한 보완과 보상(補償)을 사회와 국가에 요구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이며 현실적일 것이다.

실업자는 날이 갈수록 늘고 실업자로서의 지위조차 인정받지 못한 이른바 백수, 청년실업도 심각한 수준으로 늘고 있다. 무슨 일자리라도 좋으니 일자리를 달라고 하는 요구가 갈수록 늘고 있다. 이 같은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존재한다는 것은 알지만 이들이 힘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들은 자신에게 유리한 정책의 채용에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다. 하물며 자신을 ‘백수’라고 말한다면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따라서 청년실업자나 실업자등 일자리가 필요한 사람에게 더 많은 일자리를 제공하고 제공된 일자리가 좀 더 나은 일자리가 되기 위해서는 미조직유권자인 이들에게 일자리 자체에 대한 교섭력을 기대하기 보다는 이것을 안정망으로 보완하여 이들의 교섭력을 높이는 것이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유리한 정책이 채용되게 하는 방법이 아닐까? 나아가 ‘백수대기자’인 그 많은 대학생들과 고졸자들을 위하는 방법이 아닐까? 정책은 정의나 당위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권력(집중된 요구와 힘)이 만든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곱씹을 필요는 있다는 말이다.

미조직유권자인 이들이 ‘허드렛일’이라도 좋으니 안전망을 깔아 달라! 며 일제히 요구한다면, 노동조합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이들의 요구에 전폭적 지지를 표명한다면, 이들을 가진 부모와 형제와 친척들이 유권자가 아니라 투표자(voter)로서 협박한다면, 이들은 비록미조직유권자이지만 조직된 유권자보다 자신에게 유리한 정책이 채용되도록 압력을 가하게 될 것이고 이를 정치인들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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