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0.05.14 15:10
수정 : 2010.05.14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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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5일 경기도 용인시 소재 삼성 나노시티 기흥캠퍼스에서 열린 ‘반도체 제조공정 참석한 기자들이 삼성전자 반도체 5라인에 들어가 반도체 공정 엔지니어에게 반도체 제조 공정에 대해 설명듣고 있다. 삼성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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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도 1970년 미나마타병이 사회적 논란이 됐는데 일본 정부는 30년이 지난 2000년에서야 환경오염으로 생긴 질병임을 인정했습니다. 당시의 과학기술로는 이를 입증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삼성도 의혹이 해소됐다고만 말하지 말고 이제부터 의혹을 해소하는 과정을 시작하겠다고 말하면 좋겠습니다.”
삼성전자가 지난달 15일 백혈병 노동자가 잇따라 발생한 기흥 공장을 기자들에게 공개한 날, 일본의 한 외신 기자가 던진 질문이었다. 이에 대해 조수인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 메모리 담당 사장은 “이번 행사로 의혹이 말끔히 해소된다고 보지 않는다”며 “의혹을 계속 풀고 더 안전한 작업환경을 만들겠다”고 답변했다.
반도체공장 위험성 논란이 커지며 ‘반도체 제조 공정과 백혈병 발병과의 상관관계’ 연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2009년 5월 근로복지공단이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린 노동자들의 산업재해를 불승인했지만 ‘반도체 공장과 백혈병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해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연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처럼 반도체 공장 위험성 논란이 심각했던 영국과 미국은 모두 국가적 차원에서 자세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영국 보건안전위원회(HSE)는 2001년 영국의 ‘내셔널 반도체’에서 일한 노동자들이 일반인에 비해 암발병률이 수배 높게 나왔다는 결과를 발표했고, 미국 산업보건연구원(NIOSH)은 ‘아이비엠 반도체’ 공장에 대한 역학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는 국가적 차원의 자세한 역학조사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노동부가 2008년 3월 한달간 전국 13개 반도체 제조업체에 대해 일제 조사를 벌이긴 했지만 짧은 기간 동안 자료수집 정도만 한 것에 불과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나마 그 내용마저도 노동부는 영업비밀을 이유로 공개를 거부하고 있다. 김재균 민주당 의원은 “국가적 차원에서 반도체공장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해야 하고, 반도체 선진국답게 이미 조사된 정보에 대해서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확한 자료 없이는 논란은 사라질 수 없다. 이 때문에 반도체 공장의 위험성을 판단해야 할 산업계,의학계 관계자들의 의견은 하나로 모이지 않는다. 위험하다는 쪽과 안전하다는 쪽의 주장이 엇갈린다.
고 황유미씨를 담당한 박준성 아주대학교병원 교수(종양혈액 내과)는 의사소견서에서 “황씨의 백혈병은 장기간의 화학물질 노출이 그 발병에 일정 부분 기여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김현주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산업의학 전문의)는 좀 더 나아간다. 김 교수는 “각종 화학물질과 전리 방사선이 상호작용 하면 백혈병 발병은 촉진되며 여기에 개인의 감수성과 과로에 의한 면역력 저하 등의 요인이 관여했을 것으로 보인다”며 “백혈병과 반도체 제조 업무 연관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OO전자 기술원에서 7년간 반도체 관련 연구를 해온 김영식 박사(전기전자공학)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반도체 제조과정에서 암을 유발시키는 물질로 의심되는 것이 방사선과 화학물질(액체와 기체) 등인데 기업들이 어떤 화학물질을 사용하는지 공개하지 않아 문제가 많다”며 “엔지니어들과 일반 노동자들이 위험한 가스에 노출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지적했다.
김 박사는 가스(흄)의 위험성 정도에 대해 “독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사람을 죽일 때 사용한 가스보다 더 위험한 것들이 많다”며 “기업들은 안전장치가 되어 있어 안전하다고 얘기하겠지만 그게 수시로 고장 난다는 것이 문제”라고 덧붙였다.
반도체 폐가스 처리 연구원으로 일했던 한희석(38)씨 역시 김 박사와 비슷한 주장을 편다. 한 씨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널리 쓰이는 것이 삼불화질소(NF3),Chlorine trifluoride (CLF3) 등인데 특히 CLF3는 콜라병 1개만큼의 양만으로도 32평 공간의 사람들이 단숨에 질식사할 수 있는 위험물질”이라고 말했다. 한 씨는 기업들이 어떤 가스를 쓰는지 정확히 밝히지 않는 이유로 “이 가스들이 대기오염물질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삼성은 “백혈병 발병과 작업환경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입장이다. 삼성의 이런 주장은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이 2007년~2008년 두 차례 시행한 역학조사가 뒷받침한다. 공단은 조사결과에서 “측정이 이뤄진 9개 베이(bay) 모두에서 화학물질 노출은 매우 낮은 편이었다”고 기술했다.
또 암을 유발시킬 수 있는 방사선 노출과 관련해서도 공단은 “미리 예고된 일회적 측정이긴 했지만 그 결과가 매우 낮아 백혈병을 일으킬 수준으로 노출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작다”고 발표했다. 조사에 참여했던 조대형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 박사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조사 결과 정상적 장비 작동과 비정상적 장비 작동 모두에서 위험한 수준은 아닌 것으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렇게 양측의 의견이 팽팽히 맞서는 가운데 일부에서는 “투명한 조사만이 논란을 종식할 수 있다”고 주장을 하고 있다. 김영식 박사(전기전자공학)는 “기업들이 영업기밀이라는 핑계로 반도체 제조공정에서 사용하는 물질을 무조건 숨길 것이 아니라 비밀 유지 계약을 체결해 관련 학계와 공동연구를 통해 위험성 여부를 검토하는 것이 옳은 해결방향”이라고 지적했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문제를 지적해온 시민단체 반올림의 이종란 노무사도 “반도체 공장 피해자들이 함께 참여하는 역학조사가 이뤄져야 불필요한 논란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논란이 커지자 삼성전자는 지난달 15일 “지금까지 백혈병 발병과 우리는 무관하다는 자세를 취했지만 한 발 더 나아가 위험이 뭔지, 더 개선할 것이 뭔지 고민하겠다”며 “제3의 컨소시엄을 구성해 재역학조사를 벌이겠다”고 밝혔다.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산업안전보건연구원 역시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암발병률을 매년 확인해 반도체공장의 위험성 여부를 확인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동안 반도체와 백혈병의 업무 연관성을 극구 부인하던 태도에서 변화가 감지된다.
허재현 기자 cataluni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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