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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8.06 09:10 수정 : 2010.08.06 15:06

쌍용차 노사 대타협 1년, 화면 갈무리

[한큐] ‘쌍용차 대타협’ 그후 1년 ① 아물지 않은 상처
‘쌍용차 낙인’ 취업도 못해…해고자 64% 무직 ‘절망’

  2009년 여름,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해고는 살인”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공장문을 걸어 잠근 채 파업을 벌였다.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보기 드문 ‘옥쇄파업’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그들은 금융위기가 촉발한 기업구조조정의 칼바람에 희생된 노동자들의 상징이었다. 그렇게 77일을 버틴 파업은 지난해 8월6일 극적인 ‘노사 대타협’으로 끝났다. 공장 안에서 최후의 항전을 벌이던 976명의 노동자는 끊임없는 설득과 공권력의 투입을 이겨내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그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노동자들의 몸부림을 멈추게 한 ‘노사 대타협 합의문’은 잘 지켜지고 있을까. 아니면 옥쇄 파업의 구호대로 “해고는 살인”이었을까? <하니TV>가 쌍용자동차 ‘노사 대타협 1년’을 추적해 보았다. <편집자주>

다시 찾은 쌍용차…미래를 위한 구슬땀 

 

 “우리는 우리의 희망을 믿습니다.”

 7월의 뜨거운 햇살이 쌍용자동차 평택 공장을 비추고 있었다. 평화로웠다. 쌍용차 본사 건물 꼭대기에서 내려온 대형 펼침막은 희망을 노래하고 있었다. 1년 전 전쟁터 같았던 파업의 상흔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공장 정문 앞 바리케이드가 놓여 있던 자리에는 말끔한 유니폼을 입고 호루라기를 입에 문 경비 직원만이 바쁘게 움직였다.

 “위이잉, 휘유웅”


 조립공장의 생산 라인에는 새 자동차를 토해내는 소리가 요란하다. 수십 대의 자동차가 라인 위에서 뼈대를 갖춰나가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대형 선풍기 바람에 의지한 채 구슬땀을 흘렸다.

 1년 전 이 공장은 불이 꺼진 암흑 상태였다. 그러나 지금은 공장 구석구석까지 환한 불빛으로 어둠이란 찾아볼 수가 없다. 차체를 조립하던 배재인(49)씨는 “회사를 살리기 위해 힘든 줄 모르고 일하고 있다”며 웃었다.

달라진 노사관계…가장 먼저 ‘타임오프제’ 협상 완료 

 노조와 회사 사이에 더 이상의 갈등은 없어 보였다. 김규한 노조위원장은 “지금은 쌍용차의 회생이 시급한 과제이기 때문에 노사가 힘을 모으고 있다”고 강조했다. 노조는 전임자를 39명에서 7명으로 대폭 줄였고, 자동차업계 중 ‘타임 오프제 협상’을 가장 먼저 이끌어냈다. 지난해 9월 현 집행부가 들어서면서는 민주노총을 탈퇴하기도 했다.

 쌍용차의 정상화는 수치로도 나타나고 있다. 올해 1월부터 7월까지 4만3881대(내수와 수출 포함)의 차를 팔았다. 지난해 같은 기간 1만3000여 대 판매량보다 크게 늘었을 뿐 아니라 지난해 1월 법정관리에 들어서기 직전의 월평균 판매량에 70퍼센트 가까이 육박한 상태다.

 쌍용차는 현재 매각이 진행중이다. ‘르노·닛산그룹’을 포함한 6개 업체가 인수에 공을 들이고 있다. 8월 10일까지 입찰제안서를 받아 8월 말까지 우선협상대상자를 선정할 예정이다. 직원들은 희망을 빚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로 여기고 있다. 그렇다면, 1년 전 노사 대타협의 한 주체였던 농성 노동자들에게도 희망은 찾아 왔을까?

  

“출근하고 싶다”

 

 지난 7월 29일 아침 7시 30분 경기도 평택시 쌍용자동차 본사 정문 앞. 이십여 명의 노동자들이 정문 건너편 인도에 주저앉아 출근하고 있는 쌍용자동차 직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장으로 돌아가자’고 쓰인 조끼를 입은 해고자들의 출근 시위였다. 이들은 3~4일에 한번 씩 공장 앞을 찾아 출근시위를 벌이고 있다. 가끔 안면이 있는 직원들이 이들을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며 다가왔다.

  8년 동안 쌍용자동차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다가 3년 전 해고된 복기성(34·민주노총 쌍용자동차 비정규직지회 수석부지회장)씨는 출근투쟁만 3년을 벌이고 있었다. 지난해 목숨까지 걸고 옥쇄 파업 77일을 버텼지만 그는 여전히 해고자 신분이었다. 악에 받친 그는 동료 앞에서 체념하듯 내뱉었다. “그때 그냥 불 싸지르고 모든 걸 끝내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어.”

  같은 날, 서울 구로동 쌍용자동차 정비센터 건물 앞에서도 8명의 해고자가 ‘현장으로 돌아가자’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앞에 두고 출근 투쟁을 벌였다. 어떤 이들은 쌍용자동차에 근무할 때 입었던 작업복 차림 그대로였다. 가끔 구호도 외쳐보지만 출근하는 노동자들은 이들을 흘끔흘끔 바라볼 뿐 말을 건네오지 않는다. 익숙한 소란 속에 익숙한 침묵만 오갔다.

 경찰차가 이들 앞에 섰다. 이날 아침 해고 노동자들에게 말을 걸어온 유일한 존재였다. 경찰은 “어딘가에서 신고를 받고 출동했다”며 “소음이 심하니 확성기 소리를 줄여달라”고 말했다. 서맹섭 쌍용자동차 정비지회장이 나섰다. 그는 답답한 목소리로 호소했다. “당신이 해고를 알아요? 당신이 해고를 아냐고요?”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경찰은 “적당히 하라”는 당부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

 # 아물지 않는 상처① 아직도 옥쇄파업 중인 사람들 

 계영대(37)씨의 형 영휘(47)씨는 7월 중순께 혼자 살고 있던 동생의 집을 찾았다가 깜짝 놀랐다. 동생 영대씨가 자신의 아파트에 비상식량을 가득 쌓아둔 채 마치 옥쇄파업을 하던 당시처럼 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수 1.8리터 80박스, 쌀 20Kg 4가마, 라면 50박스, 담배 50보루가 방 한 쪽에 산처럼 쌓여 있었다.

 쌍용차에서 형 영휘씨와 함께 지난해 정리해고된 영대씨는 옥쇄파업에 참여했다가 정신질환을 앓았다. 영대씨는 파업이 끝난 뒤에도 며칠 간 회사에 정상 출근해 주변 사람들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증세는 점점 심해졌다. 영대씨는 아직도 파업이 계속 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비상식량을 비축하기 시작했다. 문도 걸어 잠그고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영대씨는 끝내 병원에 입원했다. 의사는 파업 스트레스 증후군이라며 6개월 입원 치료를 권했다. 영휘씨는 억장이 무너졌다.  

 “동료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동생을 배신하고 경찰은 노동자들에게 마구 폭력을 휘둘렀어요. 제 동생의 망가진 인생을 누가 책임질 겁니까?”

 영휘씨는 답답한 듯 담배만 피워물었다. 그의 입에서 새어나온 흰 연기가 의미 없이 공기 중으로 사라질 뿐이었다.

 

 

 쌍용자동차 파업에 참여했던 노동자들 상당수가 영대씨처럼 정신질환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해 9월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노동건강연대, 노동환경건강연구소 등이 쌍용차 파업에 참여한 257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42.8%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고 있고, 당장 정신과 치료가 필요한 ‘고도 우울증’ 환자만 41%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어떤 이들은 우울증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정리해고 통보를 받고 77일 파업에 참여한 이아무개씨. 그는 지난해 9월 새벽 2시께. 2층짜리 건물의 난간에서 고무호스에 목을 매어 자살을 시도했다. 파업이 끝난 뒤 이어지는 우울증과 불면증이 그를 자살로 내몰았다.

  “같은 노동자들끼리 새총을 겨누며 싸웠어요. 너무 비참하고 괴로웠어요. 어느 날 저녁 술을 먹고 방에 앉아 있다 바람을 쐬러 난간에 나갔는데 고무호스가 보이더라고요. 아무 생각 없이 천장에 고무호스를 걸고 목을 맸어요. 정신을 잃고 나서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습니다.”

아물지 않는 상처② 폭행의 충격 아직도… 

 8월 5일 새벽 쌍용자동차 조립공장 옥상에서는 공권력이 ‘광기의 춤’을 추었다. 이날 새벽 경찰 특공대는 공장 옥상에 올라 눈에 보이는 쌍용자동차 노조원들을 닥치는 대로 짓밟았다. 경찰은 대테러장비인 고무총을 난사했고 쓰러져 있는 노동자들을 곤봉과 방패로 수차례 찍어 내렸다. 농성 진압 과정에서 발생한 쌍방 충돌이 아니라 가해자와 피해자가 분명한 노동자 폭행사건이었다.

 경찰에 폭행당한 사람들은 이후 어떻게 지냈을까. 이들은 지난달 20일 민주노총 쌍용자동차지부 사무실에 모였다. 경찰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시작했는데 이날은 평택 경찰서에 출석해야 하는 날이었다. 이들은 아직까지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새벽에 갑자기 깨어나는 증세에 시달리고 있다고 했다. 벌써 1년이 지났지만 ‘폭행의 충격’은 파업 당시 그대로였다.

  “경찰한테 사과 한번 받지 못했어요. 경찰한테 유일하게 들었던 말은 저를 붙잡은 특공대원이 ‘자식 같은 놈한테 맞으니 좋으냐? 너 때문에 내 손가락이 부러졌어. XX놈아’ 라고 한 말이었어요.”

 다행히 경찰의 폭행 모습은 언론사 카메라에 고스란히 잡혔다. 피해 노동자들은 이것을 증거로 가해 경찰을 찾기를 원하고 있다. 하지만, 변호를 맡은 육대영 변호사의 전망은 밝지 않았다.

  “경찰이 수사할 의지가 별로 없어 보여요. 가해자의 얼굴을 제대로 식별할 수 없을 것 같다고만 하더군요. 그러나 당시 현장 지휘자가 누구인지, 투입된 사람들이 누구인지 명단을 확보한 뒤 피해자들과 대질심문을 하면 가해자를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경찰 폭행을 피한 노동자라고 해서 잘 지내는 건 아니었다. 차아무개씨는 이날 경찰 폭행을 피해 달아나다 공장 옥상에서 지상으로 떨어져 허리뼈가 부러지는 등 크게 다쳤다. 차씨는 곧바로 병원에 실려갔고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1년 뒤 차씨는 보험공단 쪽으로부터‘치료받았을 때 공단이 지출한 보험료 천 백만원을 되갚으라’는 통보를 받았다. 담당자는 차씨에게 “불법파업에 참여했다가 다친 것이니 보험 처리를 해줄 수 없다”고 설명했다. 해고자인데다 몸을 크게 다치는 바람에 차씨는 지난 1년간 수입이 전혀 없었다. 막막해진 차씨는 공단 쪽에 사정 설명을 해보았지만 공단은 “국민건강보험법상 범죄행위로 인한 사고의 경우 보험급여를 지급할 수 없다”는 설명만 되풀이했다.

“해고로 죽고, 실직으로 또 죽어”…‘쌍용차’라는 낙인

 

 쌍용자동차 농성자들은 1년 전 “해고는 살인”이라고 외치며 저항했다. 목숨까지 내걸고 공장 안에서 옥쇄 파업을 벌였던 그들에게 이 구호는 ‘미래 예언’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1년 뒤 이 구호가 조금도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해고자들은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다.

 “지난해 대구에 있는 ‘ㅎ’자동차 협력업체에 면접을 보러 갔어요. 건강검진만 남은 상태라 합격을 확신하고 있었죠. 그런데 며칠 뒤 핸드폰으로 문자 메시지가 왔어요. ‘무기한 채용 연기’라고 적혀 있더군요. 쌍용자동차 출신은 받지 않는다는 얘기를 나중에 전해들었어요. 70곳이 넘는 곳에 원서를 넣었는데 취직이 되지 않아요. 해고돼서 한번 죽었고, 취직이 안 돼 또 한 번 죽고…. 이제 이력서에 쌍용자동차 경력은 넣지 않으려고 합니다.”(김아무개씨·38·쌍용자동차 정리해고자)

 김씨처럼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은 이력서에서 쌍용차 경력을 지웠다. 십여 년간 경력 공백이 생기더라도 그게 오히려 취업에 도움이 된다는 확신 때문이다. 해고자들은 파업에 참여했건 아니건 간에 자동차 업계에선 강성 노조원으로 분류해 고용을 꺼리는 ‘사회적 낙인’이 찍혔다고 믿는다. 민주노총 쌍용자동차지부 남상수 기획부장은 “쌍용자동차 경력으로 평택시에서 취업하는 사례를 아직 보지 못했다”고 전했다.

“차만 조립하던 손으로 무슨 사업을 하겠어요” 

 일자리를 찾지 못한 해고자들은 어쩔 수 없이 자영업을 시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 성공 사례를 접하기는 힘들었다. 쌍용차에서 15년 근무한 뒤 무급휴직자로 분류돼 쉬고 있는 이아무개(43)씨는 올해 3월 10평 남짓한 가게를 얻어 야채와 과일을 팔았다. 2천만원 정도의 소자본으로 시작할 수 있는 유일한 사업이었다. 하지만, 근처 대형마트와의 경쟁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이씨는 두어 달을 넘기지 못한 채 사업을 접었다. 고스란히 천만원 넘는 손해만 보았다.

 “차만 조립하던 사람이 무슨 사업을 할 줄 알겠습니까? 해고자들 중에 제 주변에만 열명 넘는 사람들이 작은 사업을 시작했지만 잘 됐다는 사람을 한 명도 못 봤습니다.”

  해고자 대부분은 일용직을 전전하고 있다. 지난달 22일 평택시 인근 한 공장에서 만난 이아무개(33)씨의 몸에서는 기름 냄새 대신 인분 냄새가 가득했다. 이씨는 3미터 높이의 철제 닭사육장을 만들고 있었다. 이씨는 “이곳저곳을 알아보았지만 일용직 외에는 할 수 있는 일거리가 없어 임시방편으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 달 수입은 150만원 남짓. 자녀 둘을 두고 있는 이씨는 “한 달 생활비가 최소 200만원이 든다”고 말했다.

  쌍용자동차정리해고특별위원회는 최근 해고자 10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이들이 짊어진 빚은 평균 6047만원으로, 파업 이전의 5500만원에서 평균 500만원이 늘었다. 이들 중 빚을 갚을 능력이 되지 않는 2명의 해고자가 최근 파산 신청을 했고 64.2%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채 놀고 있다. 쌍용차가 희망가를 부르는 사이 해고 노동자들은 여전히 깜깜한 절망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평택/ 글·영상 허재현 기자 조소영 피디 catalunia@hani.co.kr

☞ ‘쌍용차 대타협 그후 1년’ 보도 <2편>에서는 쌍용차 노사합의문의 이행과정을 점검해봅니다. 보도는 7일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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