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05.01 20:34
수정 : 2011.05.01 21:40
‘민주노총 탈퇴’ 서울지하철노조원들의 의식변화
자녀교육·노후 걱정…승진·임금등에 눈돌려
제3노총 적극 지지보다는 “한번 배 갈아타보자”
“우리는 노동복지 사회의 실현과 선진 민주국가 건설의 기수가 된다. 우리는 노동운동의 건전한 발전을 도모해 민주노조의 사회적 사명을 다한다.”
1987년 8월 서울지하철노동조합이 출범하면서 만든 노조 강령의 일부분이다. 서울지하철노조는 강령에 적힌 대로 전국노동자협의회(전노협)의 핵심 사업장으로 활동하며 1995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을 세우는 데 큰 구실을 했다. 이처럼 한때 ‘민주노조’의 상징과도 같았던 서울지하철노조가 지난 27~29일 조합원 총투표를 거쳐 민주노총 탈퇴를 결의했다. 조합원의 53%가 찬성표를 던졌다. 그들은 왜 민주노총을 버렸을까?
서울지하철에서 20년 넘게 일하고 있는 김기철(가명·40대 후반)씨는 “솔직히 투쟁보다는 안정적으로 지내고 싶었다”고 했다. 김씨는 “젊을 때야 노조활동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이들 대학 등록금 문제, 나이 든 부모 병원비, 노후 생활 등에 더 신경이 많이 쓰인다”며 “비정규직 노동자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안정적이긴 하지만 가족들이 내 월급만 갖고 생활하기 때문에 넉넉한 형편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실제 서울지하철노조 설립 당시 20대였던 ‘청년’들은 지금 40~50대 ‘아저씨’가 됐다. 2011년 현재 지하철노조 조합원(8700여명)의 80% 이상이 40~50대다. 1997년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공공부문 인력 채용이 잘 이뤄지지 않은 탓이다.
김씨는 “요새 평균수명이 길어져 100살까지 산다고 하는데, 정년은 58살”이라며 “일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아 늘 불안한 마음”이라고 했다. 이런 김씨에겐 투쟁도 민주노총도 희망이 될 수 없었다. 그는 “여러 차례 파업을 해봤지만 공기업이라서 그런지 해고만 많이 되고, 투쟁으로 얻는 것이 별로 없었다”고 털어놨다. 또 “사회적 약자를 위해 일하는 민주노총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현장 조합원들과 거리가 너무 멀게 느껴져 ‘그들만의 노동운동’으로 비쳐졌다”고 말했다.
교육·고용·주택·노후 문제 등으로 마음이 불안해지다 보니, 조합원들은 노동운동이라는 ‘명분’보다 ‘실리’에 흔들렸다. 10년 전 배일도 전 위원장이 제3노총을 추진했을 때도, 2009년 정연수 현 위원장의 첫 번째 민주노총 탈퇴 시도에도 ‘민주노총 사수’를 선택했던 서울지하철노조였다. 차량정비 업무를 하는 박상식(가명·40대 초반)씨는 “민주노조가 실리 앞에 무너졌다”고 안타까워했다. 서울지하철 노사는 민주노총 탈퇴 투표 12일 전인 4월15일 노사협의회에서 승진 적체 해소, 임금구조 개선 등에 대해 큰 틀에서 합의를 하고 세부적인 내용은 추후 논의하기로 했다. 박씨는 “회사 관리자들이 민주노총 탈퇴가 안 되면 합의사항이 ‘물거품’이 된다고 조합원들을 설득하고 다녔다”며 “여기에 투표 결과가 43개 지회별로 공개되는데, 이 결과에 따라 성과급 액수(0~400%)와 인사가 결정된다는 소문이 쫙 퍼졌다”고 말했다.
승진과 임금, 성과급은 조합원들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다. 기관사인 한기원(가명·50대 초반)씨는 “정부 지침 때문에 7~8년째 임금이 동결이나 마찬가지여서 성과급이 중요하고, 직원 채용과 퇴직이 활발하지 않아 승진 적체는 서울지하철의 고질적인 문제”라며 “이것을 해결하려면 서울시가 나서야 하는데 정연수 위원장이 협상력이 있으니까 기대를 해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차량정비 일을 하는 이창수(가명·40대 초반)씨도 “서울지하철노조는 20대 ‘젊은 노조’가 아니라 가정을 책임져야 할 40~50대들이 대다수”라며 “노조활동이라는 것이 순수한 마음이 있어야 하는데, 조합원들도 실리가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추락하는 민주노총의 위상과 정규직 노동자들의 힘겨운 정리해고 반대 투쟁도 조합원들의 ‘표심’에 영향을 끼쳤다. 박상식씨는 “이명박 정부 들어서 민주노총의 위상이 시민단체 수준으로 떨어진 것 같다”며 “최근 쌍용차 정리해고 투쟁을 보면서 ‘저렇게 싸웠는데도 쉽지 않구나’라는 무기력한 생각도 들었다”고 말했다.
민주노총 탈퇴에 찬성했지만 조합원들이 제3노총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것도 아니다. 김기철씨는 “자율과 상생 등 새로운 노동운동을 얘기하다가 결국 한나라당 국회의원으로 간 배일도 전 위원장에 대한 기억이 있어서 그런지, 조합원들이 제3노총에 대해 크게 기대는 하지 않는 분위기”라며 “그냥 한번 지켜보자는 것”이라고 전했다. 한기원씨도 “제3노총이 정연수 위원장의 개인적 야망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민주노총이 총파업에만 매달리는 등 지하철 조합원들에게 더 이상 희망이 될 수 없으니 ‘한번 배를 갈아타 보자’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김소연 박현정 기자
dand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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