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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1.03 15:45 수정 : 2012.01.05 14:46

수원 시청 근처 있는 편의점은 대리운전하는 이원용씨의 아지트다. 쌍용차에서 일했던 동료가 낸 가게라고 했다. 얼었던 손을 녹히고 뜨거운 커피 한 잔 목에 털고 간다. 이미 먼저 온 다른 대리운전사들로 편의점이 꽉 찼다. 영상갈무리/ 조소영피디

연말연시기획|제2의 김진숙, 제3의 한진중⑥ 끝나지 않는 절망, 쌍용차
‘살았지만 죽은 중간자’ 무급휴직자가 복직을 기다리며 하는 대리운전 동행취재

 “솔직히 기다리는 것보다 새로운 것 찾는 게 빠를 것 같아 보이는데. 답답하게 언제까지 기다려요. 그 사람들(쌍용자동차)이 내 인생 내 가족 책임져주는 것이 아닌데…. 막연히 기다리는 것은 노름에서 파친코 한 방 터뜨리는 것과 똑같아요.”

 “예, 사장님, 저도 지금 답답한 게 그거죠.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지….”

 대리운전 기사 이원용(44) 씨가 머뭇거리며 답했다. 난생 처음 보는 손님이 이씨를 ‘대박을 기다리는 노름꾼’에 비유했다.  

“다른 일 찾는 게 빠르지 않나” “저도 그게 제일 고민입니다”

 2011년의 마지막날인 지난 12월31일 새벽 1시11분. 이씨는 수원시청 앞 유흥가 길 한가운데서 40여 분을 기다려, 겨우 평택 근처로 돌아가는 콜을 잡을 수 있었다. 영하 4℃. 바람이 불지 않아 참을 만한 밤이다. 40분 동안 이씨는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손 안의 스마트폰만 들여다봤다. 좋은 콜(대리운전 프로그램에 뜨는 대리운전 요청을 부르는 말)을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대리운전의 제1 덕목은 좋은 콜을 잡는 것이다. 좋은 콜이란, 다음 콜을 잡을 확률이 높은 시내 근처로 가는 것이다.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주택가로 가면 한두 시간쯤 걸어나와야 한다. 예전에 평택 칠곡저수지까지 갔다가 영하의 날씨에 한 시간을 걸었던 기억이 있다. 방향도 중요하다. 평택에서 출발해 수원까지 온 그는, 다시 평택 방향 콜을 잡아야 한다. 그래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수월하다. 그러나 수원 시내에서 평택으로 가는 콜은 쉽게 뜨지 않았다. 스마트폰을 터치해야 하기 때문에 장갑을 끼지 못해 손이 새빨갛게 얼어붙었다.  

 지붕 하나 없는 길 한가운데는 대리운전 기사들의 집합소다. 한 노래주점 앞에 4명의 대리 기사들이 콜이 뜨길 기다리며 스마트폰을 집요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대리 부르셨어요” 이원용씨는 세차장 골목에 주차했다는 스포티지의 문을 두드렸다. 골목길로 빠르게 달려 8분만에 찾아왔다. 밤새 뛰고 걷고 하는 대리운전을 하면서 “쌍용차 있을 때가 천국같다” 말했다. 오늘은 외곽을 많이 가는 날이다. 영상갈무리/ 조소영피디

 인천에서 수원까지 온 50대 대리운전기사가 이씨에게 말을 걸었다. “콜이 없죠?”

 2011년의 마지막 금요일 밤인데 대리운전 수요가 생각보다 적었다. 하루 전인 12월29일 밤에는 프로그램에 뜨는 콜만 1500건가량 됐는데 이날은 절반 수준인 750여 건이었다. 이씨도 ‘콜이 없다’고 중얼대며 스마트폰과 눈싸움을 했다. 40분을 노려본 결과, 평택으로 가는 콜을 잡았다. 2만5천원짜리였다. 손님이 있는 곳까지 뛰어갔다. 평택시민인 손님은 전국금속노동조합 쌍용자동차지부가 수익사업으로 운영하고 있는 참 대리운전 1577-6406을 눌렀다. 그리고 운전기사가 도착하자 말을 꺼냈다.“복직이 되긴 되는 겁니까.” 

 이씨도 모른다. 복직이 될지는. 이원용씨는 쌍용자동차로의 복귀를 기다리는 ‘중간자’다. 공장 안 노동자를 일컫는 ‘산자’도 해고자인 ‘죽은자’도 아니다. 지난 2009년 쌍용자동차가 전체 직원의 36%에 해당하는 2646명 정리해고 방침을 발표하자 노조원들은 77일간의 공장점거 파업에 돌입했다. 이씨도 77일 동안 공장을 점거하며 파업에 동참했다. 회사가 전기·물·음식을 다 끊어버린 10여 일의 고통, 헬기를 띄우고 최루액을 살포하던 끔찍한 시간을 건넌 뒤 쌍용자동차 노사는 이른 바 ‘8·6 대타협’을 이뤄냈다. 그 대타협은 그러나 노동자들을 47:53으로 갈랐다. 정리해고자 974명의 47%에 해당하는 461명(1명 사망해 현재 460명)은 1년 뒤 생산물량에 따라 복직 가능성이 열리는 무급휴직자가 됐다. 나머지 53%에 해당하는 513명은 회사를 떠나게 됐다. 

 이원용 씨는 그 때 ‘다행히’ 무급 휴직자의 대열에 포함됐다. 지난 12월30일 오후 7시, 경기도 평택시 칠괴동 쌍용자동차 공장 정문 앞에서 만난 이씨는 “그때는 1년 뒤엔 복직할 수 있겠다는 희망과, 복직 대열에 들어서지 못한 동료에 대한 미안함이 똑같았다”고 말했다. 이씨는 “복직해야 하기 때문에, 회사 눈치를 보느라 이쪽으로 잘 오지 못했다”고 말했다.

기약 없는 기다림

 그가 미안함을 말하는 현장에선 서석문씨가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서씨는 애초 정리해고 대상자가 아닌 ‘산자’였지만 정리해고에 반대하며 77일 공장점거 파업에 동참했다. 그리고 이후 파업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해고됐다. 그는 ‘부당해고’라며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서씨가 바라다보는 곳에는 정규직·비정규직 해고노동자 30여 명이 매일 잠을 청하는 희망텐트가 비닐 옷을 입은 채 덩그러니 서 있다. 그 앞에선, 한국기독청년연합회원 30여명이 해고된 뒤 죽음을 선택한 19명의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와 가족을 추모하는 기도회를 열고 있다. 추모와 시위와 노숙의 현장 뒤에 서서 이씨는 대리운전 나갈 채비를 했다.

메인 쌍용자동자 평택공장 앞에 세워진 텐트들. 해고자들은 좁은 텐트 안에서 몸을 맞대며 추운 겨울밤을 보낸다.

 겨울의 대리운전은 고되다. 이 날도 그랬다. 오후 9시께 평택중앙병원 앞에서 받은 첫 손님인 조선족 4명을 한 차에 태우고 안성시까지 데려다 준 뒤 받은 돈은 1만3천원이었다. 도착지에서는 콜이 안 잡히기 때문에 술집이나 음식점이 많은 ‘먹자’(콜이 잘 뜨는 곳을 부르는 대리운전기사들의 용어)로 이동해야 했다. 빨리 이동하려고 막 뛰었다. 뛰면서도 콜이 뜨는지 보기 위해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콜이 떴다. 수원까지 가는 콜이었다. 무려 4만5천원이다. 손님이 있는 곳까지 빨리 가기 위해 택시를 잡아탔다. 수원에 도착해선 난감했다. 손님의 도착지는 다세대주택이 밀집한 곳이었다. 길을 잘 몰라, 편의점 세 군데에 길을 물어 도로변으로 겨우 나갔다. 이 곳에서 중심가인 수원시청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지하철 등이 끊기는 새벽 2시께엔 하염없이 걸었다.

 걷다보니 대리운전 기사들을 위한 ‘셔틀’이 경적을 울렸다. 1천원을 내면 ‘먹자’까지 데려다 준다. 도착지에서 셔틀이 많은 곳으로 이동하기 위해 걷고 달린다. 이씨는 “밤마다 달리고 걷기를 반복하느라 살이 많이 빠졌다”며 “콜 잡겠다는 생각에 정작 일할 때는 추운 걸 모르지만 집에 가면 정말 피곤하다”고 말했다.

“대리는요, 누가 콜을 빨리 잡느냐 싸움이거든요.” 쌍용차 무급휴직자이며 대리운전 1년차인 이원용씨. 운전을 하면서도 전화기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영상갈무리/ 조소영피디

4대보험이 되는 직장은 법적 불리, 선택의 여지 없어

 겨울의 대리운전보다 힘든 건 기약 없는 희망이다. 약속대로라면 2010년 8월 이씨는 복직해야 했다. 그러나 회사는 ‘복직 불가’ 방침을 전했다. 애초 합의안이 ‘생산물량에 따라 복직한다’는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은 ‘여기에 순환근무가 이뤄질 수 있도록 연속 2교대제 등을 실시해 복직한다’는 조건을 내걸었지만 회사 쪽은 ‘주간근무만 해도 물량이 모자라 노는 손이 많다’고 주장한다. 쌍용자동차 관계자는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들이 복직하게 되면 2009년의 대량 정리해고 사태가 재발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현 상태로서는 무급휴직자 복직이 불가능하다는 설명이다.

 기다림의 시간 동안 19명의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와 그의 가족이 죽음을 선택했다. 1년 전인 지난해 2월19일 무급휴직자 임아무개(43)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씨는 운전대를 잡지 못했다. 서러움이 북받쳤다. 임씨의 아내도 우울증과 스트레스로 2년 전 투신자살했다. 남은 건 중학생, 고등학생 두아이들이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직원만 수천 명에 달하는 터라 잘 알지 못했지만, 그가 겪은 아픔은 이씨의 아픔과 똑같다고 생각했다. 빈소에 찾아가서 소주 한 병을 말없이 들이키다 돌아왔다.

 김남섭 전국금속노동조합 쌍용자동차지부 사무국장은 “해고노동자, 무급휴직자 50여명 정도가 대리운전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무급휴직자의 경우 대리운전, 막노동 등 날품팔이 일을 하고 있다. 김 사무국장은 “회사가 복직을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아 민사 소송을 진행중인데, 4대보험이 되는 직장에서 일할 경우 법적으로 불리할 수도 있어, 무급휴직자들의 경우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이씨도 일당 7만원을 받고 새시 다는 일 5개월, 일당 8만원을 받고 반도체 공장 하청업체로 들어가 임시로 물량을 맞춰주는 일을 몇 개월 했다. 그러나 임시직이라, 열심히 일해도 다시 불러주는 일은 없다. 결국 대리운전의 세계로 들어왔다.

출근하는 사람들과 부딪치지 않아 다행

 대리운전을 하면서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현저히 줄었다. 오후 9시부터 다음날 오전 5시~6시까지 대리운전을 하고 나면, 집에 가서 아침만 먹고 잠을 잔다. 다음날 오후 4~5시쯤 일어나 다시 일하러 나와야 한다. 초등학교 4학년, 2학년 두아이들 얼굴 볼 시간도 없다. 이씨의 아내는 이씨가 해고된 뒤부터 어린이집 교사를 하고 있다. 그리고,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가족의 심리치유를 담당하고 있는 ‘와락센터’에서 정신 상담을 받는다. 듬직하고 말수가 없는 아내지만 그때 기억을 다시 끄집어내고 쏟아내는 일을 힘들어한다. 아내에게 그런 고통의 시간을 안겨 준 게 괴롭다.

 31일 오전 7시. 밤새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이씨는 “토요일이라 다행”이라고 말했다. 출근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이다. 밤새 대리운전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출근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 이들을 보면 눈물이 핑 돈다. 다시 출근하고 싶은 마음, 부러운 마음 때문이다. 2011년의 마지막 날, 출근하는 사람들과 부딪치지 않아 참 다행이다. 오늘은 이씨에게 운수좋은 날이다. <기획연재 끝> 

평택/글·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사진·영상 조소영 피디 azuri@hani.co.kr

 

 김진숙은 2011년의 가장 극적인 이름이다. 뭇사람들의 관심이 아니었다면 그는 그저 사유재산을 불법점거한 ‘범법자’에 불과했을 것이다. 혹은 같은 곳에서 몸을 던진 김주익처럼 비극이 연출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일어난 자발적인 연대에 힘입어 김진숙은 꺾이지 않는 희망의 상징이 됐다. 무엇보다 외환위기 이후 습관처럼 굳어진 정리해고 남발이라는 관행에 제동을 걸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제2의 ‘김진숙’이 제3의 ‘한진중공업’에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농성 5년째를 맞는 콜트콜텍과 재능교육, 민주노조 와해 공작의 희생양이 된 유성기업과 발레오, 전북고속, 그리고 19명의 사망자를 내며 동시대인들의 양심에 깊은 생채기를 남긴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 이들이 온몸으로 부딪치고 있는 지옥 같은 사태의 기원은 한진중의 그것과 뿌리를 공유한다.

 새 희망버스가 향해야 할 제2의 김진숙, 제3의 한진중에 <한겨레> 기자들이 다녀왔다. 1박2일 동안 길바닥에서 노숙농성을 함께하며, 땅에 처박힌 노동3권이 헌법상의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새해가 되기를 기원했다.

 ‘노동자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 70년대의 해묵은 구호가 2012년의 세밑을 울린다. 편집자

■ 제2의 김진숙, 제3의 한진중

1회 노동자로 인정받기 위한 싸움, 재능교육의 4년
2회 무책임한 공장 이전의 희생양, 콜트콜텍의 4년10개월
3회 “밤엔 잠 좀 잡시다” 외치다 짓밟힌 유성기업 노조

4회 처참한 노노갈등의 현장, 전북고속의 파업 1년
5회 버림받은 민주노조, 발레오전장

6회 끝나지 않는 절망, 쌍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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