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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해’가 9일 경기도 안산시 원곡동 천주교회에서 연 ‘이주노동자와 함께하는 즉흥연극 플레이백 시어터’ 공연에서 필리핀 노동자 빌리 벨라가 들려준 이야기를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연기로 보여주고 있다. 한국말에 능숙하지 못한 이주노동자들을 위해 연극은 노지향 대표(뒷줄 왼쪽부터)가 질문으로 벨라의 이야기를 타갈로그어로 풀어내면 유진 노코이 신부가 통역해 배우들이 극을 구성하는 식으로 진행됐다. 안산/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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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해’ 안산 성당서 즉흥연극 공연
“한국에 처음 왔을 때는 엄마와 전화할 때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으면 바로 끊어버렸어요. 저는 ‘그저 엄마 걱정 마세요’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어요.” 9일 오후 4시, 경기도 안산시 원곡동 성당 강단은 평소와 달리 무대로 바뀌어 있었다. 관객들은 모두 필리핀 노동자들. ‘연극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미사 뒤에도 남아 기다리던 60여명의 눈길이 무대 위로 모였다. 연극은 뜻밖에도 배우들의 대사 대신 관객이자 동료 필리핀 노동자인 빌리 벨라(24)의 이야기로 시작됐다. 나지막이 담담하게 털어놓는 빌리의 경험담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니었기에 관객들은 곧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빌리가 이야기를 마치자 곧바로 배우 4명과 연주자 1명이 무대에 올랐다. 말은 달라 한국말이었지만 배우들은 빌리가 한 이야기를 무대 위에서 즉흥적으로 연기해 보였다. 대사는 한국어로 바뀌었어도 관객들은 배우들의 연기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웃고, 숙연해졌다. 대본도 없고 리허설도 없는 현대 연극 ‘플레이백 시어터’가 외국인 노동자들을 만났다. 이날 공연은 ‘억압받는 이들을 위한 연극공간’을 기치로 내건 극단 ‘해’가 지난 4월부터 진행해오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공연이었다. ‘플레이백 시어터’란 말 그대로 비디오 재생기로 테이프를 되감아 시간을 돌리듯 관객의 이야기를 무대 위에서 연기로 보여주는 현대극이다. 75년 미국 뉴욕에서 시작된 플레이백 시어터는 교육·치료 효과가 커 세계적으로 100여개의 극단이 활동할 정도로 널리 퍼졌다. 극단 해는 이 연극을 소외된 이들과 소통하는 길로 삼아 직접 관객들을 찾아가고 있다. 객지 설움·가족과의 이별…관객이 고백하는 이야기
즉석에서 연극으로 옮겨
“누군가 힘든얘기 들어주면 그들에겐 큰 위로가 돼요” 이날 연극에서는 필리핀 노동자 관객 네 명의 이야기가 무대 위에서 연극으로 펼쳐졌다. 처음에는 머뭇거리던 관객들은 일단 빌리가 물꼬를 트자 곧 적극적으로 변해 무대에 올라 망설임 없이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어머니가 중풍에 걸려 고생할 때 한국에서 만난 필리핀 친구들이 돈을 빌려준 사연, 한국에서 만난 친구들이 깜짝 생일잔치를 해준 이야기, 공장에서 만난 한국 여자와의 사랑…. 연극은 필리핀 사람들의 달콤쌉싸름한 한국살이를 담아 1시간30여분 동안 이어졌다. 빌리는 “외롭고 힘들었던 이야기를 배우들이 실제 내가 느꼈던 것보다 더 자세히 표현해 줬다”며 “이야기를 하고 나니 편안해졌다”고 말했다. 친구들에게 도움 받은 이야기를 한 마니 마농송(31)은 “다 털어놓으니까 여기 모인 사람들과 진짜 친구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노지향 극단 해 대표는 플레이백 시어터를 ‘공감과 위로의 연극’이라고 설명했다. 노 대표는 “기쁜 이야기든 슬픈 이야기든 정성껏 들어주는 것 자체가 사람들에게 기쁨과 위안을 준다”며 “이 연극이 당장 이주노동자의 권익을 향상시킬 수는 없지만, 한국인과 이주노동자가 서로 마음을 나누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고 싶다”고 말했다. 연극이 끝난 뒤 노 대표와 배우들이 관객들에게 물었다. “다음에 다시 와도 될까요?” 곧 정겨운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그럼요, 언제든지요.” 안산/조기원 기자 gard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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