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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에서 소사장제 특수고용직 노동자로, 다시 하청업체의 소사장으로 신분이 바뀌게 된 의류업체 루치아노최 노동자들이 파업 농성 8일째를 맞은 15일 오후 성수동의 회사 앞 천막농성장에서 분임토의를 하고 있다.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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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백만원짜리 1벌 만들면 7천~2만7천원 받아요
올가을 들어 가장 추웠던 15일 오전 서울 성수동의 한 의류공장 앞마당. 모두 50대 안팎인 중년의 노조원 60여명이 8일째 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이들은 국내 최고급 디자이너 브랜드 의류업체로 꼽히는 ‘루치아노최’의 미싱사들과 조수들이다. 가장 젊은 막내도 40대 중반이다. ‘백발’의 미싱사들이 파업에 나선 발단은 지난달 17일 “기존의 생산라인을 둘로 나눠 하청회사에 맡기기로 했으니 하청회사로 가라”는 회사의 갑작스런 지시였다. 디자이너 브랜드 의류업체 노동자들 사이에 불고 있는 노조 결성 바람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의도였다. 몇십년 한솥밥을 먹어온 이들은 “노조를 만들지 않을 테니 갈라놓지 말아달라. 다른 곳으로 가더라도 한곳에 가서 일하게 해달라”고까지 애원했으나, 회사 쪽은 외면했다. 결국 이들은 이틀 뒤인 지난달 19일 서울의류업노조에 집단으로 가입해 ‘루치아노최 분회’를 결성했다. 노조가 결성되자 그동안 겪었던 ‘서러움’도 폭발했다. 노조원 65명 가운데 59명이 개인사업자 등록증을 갖고 있는 이른바 ‘소사장제’ 노동자들이다. 월급 대신 만든 옷의 수량만큼 회사에서 돈을 받는다. 정규직 노동자였던 이들의 신분이 ‘사장’으로 바뀐 것은 1997년 외환위기 직전이었다. 김아무개(45) 조합원은 “해고의 공포 때문에 ‘소사장제’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하루아침에 신분이 바뀐 이들에겐 건강보험 등 4대 보험과 퇴직금 등도 모두 없어졌다. ‘3일 무단결근 때 해고’ 같은 엄격한 규칙은 ‘납품계약 해지’로 바뀌었다. “우리는 개인사업자 등록증이 어떤 것인지 한번 보지도 못했어요.” 한 조합원(54)은 “공장의 모든 집기와 기계들은 회사 것이고, 사업자 등록부터 세금 계산까지 모두 회사가 처리한다”고 말했다. 이들 가운데 17쌍 34명이 부부다. 1970년대 어린 총각·처녀 미싱사들은 저임과 혹독한 노동에 작업장을 벗어날 새가 없었다. 이 때문에 대부분이 같은 공장에서 만나 20~30여년 맞벌이를 하고 있다. 이들이 ‘귀부인’ 등을 위해 만드는 바지 한 벌은 60만~70만원, 위·아래 의상 한 벌은 몇백만원을 호가한다. 하지만 이들의 손에 쥐어지는 것은 한 벌당 7천~2만7천원이다. 부부가 한 달 일해 건강보험과 국민연금을 내고 나면 300만원 가량이 남는다. 물론 일감이 있을 때의 얘기다. 일감이 없거나 몸이 아파 일을 못하면 한푼도 받지 못한다. 정재국 서울의류업노조 재정부장은 “70년대 중반 이후엔 청계천 미싱사들도 최소한의 기본급은 받았지만, 30년이 지난 지금 전태일 열사의 후배들은 노동자의 지위마저도 박탈당했다”고 말했다. 노조가 ‘소사장제 철폐’를 들고 나오자, 회사 쪽은 두 개의 하청업체로 노동자를 나누려던 계획은 철회했다. 하지만 회사는 노조원들을 향해 “당신들은 노동자가 아니다”라며 교섭조차 거부하고 있다. 파업에는 즉각 직장폐쇄로 맞섰다. 14일 오전엔 농성 중인 조합원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사설경비원 50여명을 투입했다가 물러났다. 노조의 요구와 파업농성 등에 대해 회사 쪽은 15일 “뭐라고 답변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양상우 기자 ys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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