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6.07 21:04
수정 : 2006.06.07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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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규찬 한국예술종합학교 방송영상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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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전망대
완장이 설치는 광장은 더이상 광장이 아니다. 앉을 자리, 서 있을 자리가 지정된 광장, 울타리가 쳐지고 다녀야 할 통로가 지정된 광장은 아무도 광장이라 부르지 않는다. 광장에서 시민은 자율의 아름다운 미덕을 발휘하나, 강제된 공간에서는 오히려 변덕을 부린다. 통제·규율의 불쾌함에 대한 보복이다. 그래서 쓰레기가 나뒹군다. 가나와의 평가전 이후 시청 앞 풍경을 두고 〈세계일보〉는 ‘거대 쓰레기투성이의 응원 현장’이라고 비꼬았다. 그렇다. 제어없는 자본의 논리가 날뛰는 곳에, 일방적 상업주의가 판을 치는 곳에 거대한 쓰레기더미만 남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아무리 구멍 난 잔디를 매일매일 땜질하고 그 전면에 화려한 무대를 설치하고, 짧은치마 입은 소녀들을 내세워 태극기를 휘둘러대도 피할 수 없는 게 쓰레기의 잔해다. ‘대~한민국’의 구호를 떠나갈 듯 내지른다 해도 덮을 수 없는 게 산적한 오물의 운명이다. 이렇게 광장은 금방 쓰레기장으로 전락할 수 있다.
어찌 그뿐이겠는가? 광기의 쓰레기는 신문과 방송이라는 다중의 광장, 공적 영역에도 철철 넘쳐흐르고 있다. 구토증 나는 진물이 일상으로 잔뜩 배어들고 있다. 〈한국방송〉 본관에 내걸린 대형 걸개 사진들, 〈문화방송〉 스포츠국 복도를 도배한 홍보포스터들은 월드컵에 미친 이 땅의 ‘공영방송’들의 정신 상태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지난 가나전은 월드컵 대표팀의 평가전이 아닌, 중계 방송사들의 양보할 수 없는 평가전에 불과했다. 국가 연주 때 꽹과리를 친 응원단이 곤욕을 치르고 있다. 응원에 열중하다 보니 상대방 국가가 연주되는지 몰랐다고 변명했다. 수긍하기 어렵다. 그러나 어찌 이들만 탓할 수 있겠는가? 이토록 우리의 의식, 모두의 눈과 귀를 멀게 한 주범은 대체 누구인가? 시도 때도 없이 응원의 꽹과리를 쳐대는, 자발적 열기를 넘어 몽환의 광기로 전체를 애국의 응원판으로 내몰고 있는 당사자는 누구인가? 지겹도록 ‘대~한민국’을 호명하는 기관은 누구인가? 합리적 여론광장, 민주적 언론광장, 카니발적 문화광장의 기능을 망실한 방송사들이 아니던가?
놀이는 선전을 모른다. 놀이 자체를 위하지 않은 것은 전부 가짜다. 상품이고 신화다. 우리를 물구나무서게 만드는 허위의식이다. 공권력에 침탈당하는 노동자들을, 협상에 들어간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길거리에 내몰린 케이티엑스(KTX) 여승무원들과 평택 주민들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다. 그런 쓰레기로 득실대는 시청 앞은 선전무대에 불과하다. 월드컵에 집착하는, 몰입을 선동하는 공영방송이 바로 그 거짓광장의 모퉁이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로운 유희의 시간, 해방된 축제의 공간을 허하지 않는 ‘나쁜’ 방송이다. 아무리 현란한 스펙터클의 기술을 구사해도, 자본의 배후, 선전의 본성을 감출 수 없다.
이후를 어떻게 감당할 건가? 월드컵은 끝나도 복잡한 현실은 계속된다. 황우석 사태를 통해 배운 게 정말 아무것도 없는가? 광기를 서둘러 접어라. 아니면 스스로가 허접한 쓰레기로 취급될 따름이다. 잘난 자의 별난 경고가 아니다. 월드컵과 편히 놀고자 하는 광장, 즉 공적 영역을 지키고자 하는, 월드컵과 무관하게 진행되는 사태를 책임지고자 하는 보통 시민의 통첩이다. 텔레비전이여, 우리를 제발 쓰레기 난잡한 후진 공연의 관객으로 내몰지 마시압.
한국예술종합학교 방송영상과 교수
eunacom@knu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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