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6.30 19:19
수정 : 2006.06.30 20:44
[하니바람] “한겨레, 고민해야 할 때요”
“〈한겨레〉가 지면에서 의견과 사실을 구별해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요. 의견을 사실처럼 말하고, 사실을 의견처럼 말하지 말라는 거예요.”
목소리를 높이고선 겸연쩍은 듯 씨익 웃습니다. 2년만 있으면 환갑인데 웃는 그의 모습은 유년시절 장난꾸러기 같습니다.
김훈. 2002년 한겨레 사회부 기동팀 기자.
‘하니바람’에 김훈을 쓰면 어떨지를 한겨레 사람들에 물어봤습니다. 고개를 가로젓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김훈의 보수성이 한겨레와 맞지 않는다는 게 그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휴머니즘에 가득 찬 김훈 같은 보수주의자를 품을 수 없다면 어찌 한겨레일까요. 고개를 끄떡인 사람이 더 많아, 만나보기로 했습니다.
“진보나 보수를 따지기 앞서 구체적 삶을 어떻게 다룰지…”
지난달 26일 부슬부슬 비 오던 날. 김훈은 훌쩍 떠난 지 4년 만에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를 찾았습니다. 그런 그에게 한겨레가 많이 변했느냐고 물었습니다. 좋은 말을 기대하지 않았지만 되돌아 온 건, “의견과 사실을 구별하라”였습니다.
2002년 2월 그는 바바리코트 깃을 올리고 종로경찰서 기자실에 들어섰습니다. 〈시사저널〉 편집장에서 경찰기자로 ‘백의종군’한 것이지요. 팀장의 지시를 하늘처럼 받들었던 그는, 반백의 머리카락 휘날리며 ‘현장’을 뛰어다니며 기사를 썼습니다.
한겨레에 오자마자 24시간 맞교대하는 철도 노조원들의 열악한 노동 현장을 보여줬습니다. 3월에는 부산 중국민항기 추락 현장을 다녀왔습니다. 6월 월드컵 거리응원 현장에서도 취재하는 그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여름에는 허원근 일병 의문사에 매달려 강원도로 뛰어다녔고, 그해 겨울에는 노무현-이회창 후보가 맞붙은 대선현장을 취재했습니다.
기동팀에 있을 때 기억나는 것을 물어봤습니다. ‘월드컵 거리응원’이라고 말하더군요. “우리가 자랐던 시절하고는 정말로 다르더만 ….”
그는 한겨레 있으면서 100여편이 넘은 기사를 썼는데, 압권은 ‘거리의 칼럼’이었습니다. 그의 칼럼은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보여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원고지 3.5매의 짧은 글안에는 현장을 볼 수 있고, 팩트가 녹여져 있었습니다. 막판 반전은 치밀했고 감동적이었습니다.
스타일리스트 김훈의 칼럼은 한겨레 기자뿐 아니라 경쟁지 기자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한 때 젊은 기자들 사이에선 김훈의 ‘간결체’와 ‘막판 뒤집기’를 따라하려는 어줍잖은 시도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데스크들로부터 판판이 깨졌습니다. 기본이 안 돼 있으면서 기교만 부린다는 것이지요.
한겨레 얘기를 해달라고 했습니다. 고민하던 그가 입을 열었습니다. “사실에 입각한 객관적 저널리즘으로 존재하느냐, 아니면 하나의 사회세력으로 존재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때지요.” 그의 말은 이어졌습니다. “진보니 보수니 따지는 것에 앞서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을 어떻게 다룰지 고민해봐야 합니다.”
김훈에게, 한겨레의 존재이유를 물어봤습니다. “한겨레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강자와 다수가 아닌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생각을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김훈의 검지와 중지 손가락에는 굳은살이 깊이 박여 있습니다. 인터넷에 떠도는 박지성 발처럼 못생겼습니다. 김훈의 울퉁불퉁한 손가락을 보면, 그가 한 문장을 만들기 위해 연필로 꾹꾹 눌러 썼다 다시 지우개로 지우는 고독한 모습이 떠오릅니다. 수십 번의 이런 과정을 거쳐 그만의 스타일을 만들어 냈겠지요.
“의견을 사실처럼 말하고 사실을 의견처럼 말하지 말라”
그와 인터뷰를 하는 중간 중간 어디에서 개소리가 들렸습니다. 진원지는 그의 휴대전화였습니다. 그에게 전화가 올 때마다 휴대전화는 ‘왕~왕~왕~’ 울었습니다. “내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지냈어요. 은둔이나 자폐가 아니죠. 혼자 있을 때 가장 생산적이고 가장 바쁘고, 가장 재미있어 혼자 있을 수밖에 없어요”라고 말하는 그에게 휴대전화는 방해자일뿐이겠지요.
뒤풀이로 간 밥집에서 그와 그를 찾아 온 한겨레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유쾌한 자리였습니다. 김지하 시인이 도마에 오르고, 북한 작가들의 혁명성과 남한 작가의 퇴폐성이 맞부딪혔습니다. 무지몽매한 젊은 놈들과 글 나부랭이들이 밥상에서 마구 마구 씹혔습니다. 인터넷 한겨레(hani.co.kr)와 7월1일 문을 여는 〈e하니바람〉(hanibaram.hani.co.kr)에서 뒤풀이편을 기대하십시오.
정혁준/편집국 편집기획팀
june@hani.co.kr
김윤섭/포토그래퍼
outskirts@naver.com
|
김훈의 기사
서울 종로구 인사동 술집골목에는 밤마다 지식인, 예술가, 언론인들이 몰려들어 언어의 해방구를 이룬다.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논하며 비분강개하는 것은 그들의 오랜 술버릇이다.
그 술집골목 한복판에 '라파엘의 집'이라는 시설이 있었다. 참혹한 운명을 타고난 어린이 20여명이 거기에 수용되어 있었다. 시각.지체.정신의 장애를 한몸으로 모두 감당해야 하는 중복장애 어린이들이다. 술취한 지식인들은 이 '라파엘의 집' 골목을 비틀거리며 지나서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동전 한닢을 기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라파엘의 집'은 전세금을 못 이겨 2년 전에 종로구 평동 뒷골목으로 이사갔다.
'라파엘의 집' 한달 운영비는 1200만원이다. 착한 마음을 가진 가난한 사람들이 1천원이나 3천원씩 꼬박꼬박 기부금을 내서 이 시설을 16년째 운영해오고 있다. 후원자는 800여명이다. '농부'라는 이름의 2천원도 있다. 바닷가에서 보낸 젓갈도 있고 산골에서 보낸 사골뼈도 있다. 중복장애 어린이들은 교육이나 재활이 거의 불가능하지만 안아주면 온 얼굴의 표정을 무너뜨리며 웃는다.
인사동 '라파엘의 집'은 술과 밥을 파는 식당으로 바뀌었다. 밤마다 이 식당에는 인사동 지식인들이 몰려든다. hoonk@hani.co.kr
김훈이 한겨레를 떠난 이유①[2003년9월] 김훈이 한겨레를 떠난 이유②
|
|
|
|
김훈 1948년생 현 소설가, 언론인
전 한국일보 문화부 기자 전 시사저널 편집국장 전 국민일보 편집위원 전 한겨레신문 민권사회부 기자
작품활동 ‘칼의 노래’(동인문학상 수상) ‘자전거 여행’ ‘강산무진’등 다수
|
|
|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