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니바람
직장 그만둔 지 4개월.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선택한 일이지만 저축도 없고 결혼할 남자도 없기에 주변 사람들은 우려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심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였습니다. 적어도 당시에는 그랬습니다. 그런 요즘, 고민에 빠졌습니다. 파던 우물을 다시 파는 경력직으로 구직을 할 것인지, 해 보고 싶던 일을 위해 새 우물을 팔 것인지. 서른셋. 지금의 인생 방향이 앞으로 나의 중년의 모습을 결정할테죠. 그래 가보자. 부푼 기대를 안고 도착한 백두산 천지. 그러나 고민을 은밀히 고백하기에는 한국 사람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휴가철이기도 하거니와 한국인의 몸속에 ‘백두산을 좇도록’ 하는 유전자라도 들어 있는지요. 백두산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설레는 얼굴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습니다. 그러나 천지는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더군요. 1박2일 동안 비행기, 기차, 버스 타고 새벽 5시에 일어나 찾아갔건만 천지는 안개로 인사를 건넸습니다. 전날 밤, 신나게 내리던 비가 화근이 아닐까 싶더군요. ‘이 안개를 보려고 빚내서 이곳까지 왔던가.’ 가슴에 눈물방울이 절망, 절망 하고 맺혔습니다. “짜증나!”가 수박 씨 뱉듯 퉤퉤퉤 뱉어졌습니다. 마치 불투명한 내 미래를 보는 것 같아서. 자신이 찾고자 하는 답은 언제나 자신의 가슴속에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습니다. 모순적이게도 그 어느 곳에는 내가 찾고자 하는 보물섬이 있다고 믿는 이중성이 문제였죠. 천지 주변 장사꾼들은 맑고 푸른 천지를 배경으로 관광객들의 사진을 찍어 파는 일을 했습니다. 사진 속의 웃고 있는 사람들에게 질투가 났습니다. ‘저들은 저 풍경을 봤구나. 천지의 장엄하고 깨끗한 자태를. 그들은 분명 보물을 찾아 갔겠지.’ 다음에 다시 오면 된다고 억지 위로를 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못한 숙제를 남 탓 하듯 인생의 문제를 천지 탓으로 돌리고 말았습니다. “이번에 내 인생 안 풀리면 당신 탓일 거예요.” 저 아래서 가이드가 어서 내려오라고 부르네요. 이대로 정말 가야 하나 망설이는데 사람들이 갑자기 “와~” 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천지를 흰 커튼처럼 가리고 있던 안개가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서서히 걷혀 갔습니다. 장대한 백두산의 위용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너무나 감동하여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애국가를 부르는 사람도 있었지만 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누구는 천지에 발 담그고 손 닦으며 감동을 느꼈다는데, 나는 천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귀한 선물을 받은 것 같았습니다. 마치 안갯속 내 인생이 해가 뜰 때까지 기다리라는 답을 받은 것처럼.나혜영 리포터 ■ 한겨레신문사 주주.독자 전용매거진 <하니바람> 3호 여름휴가 특집호 보러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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