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중앙정보국(CIA) 정보분석관을 역임한 칼린은 한반도관련 싱크탱크인 노틸러스연구소 홈페이지에 실린 글 서두에서 “며칠 전 프라하에서 온 기름종이에 싼 편지를 받았는데, 내용은 강 부상의 연설을 받아쓴 것”이며 “더는 구체적으로 묻지 말라”고 밝혔다. 그리고는 ‘동지들’로 시작되는 편지 내용을 전하는 형식으로 글을 쓰고 있다.
칼린은 국무부 정보조사국(INR) 동북아과장 등을 거친 북한 전문가다. 게다가 미국내에서 북한의 원전을 그대로 읽을 수 있을 정도의 한국어 실력이 되는 몇 안 되는 인물이기에 이 글에 대한 신뢰는 컸다. 게다가 그 연설 내용을 보면 북한은 지금껏 핵능력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한 적이 한번도 없는데, 북한의 핵능력 및 북-미 관계에 대해 매우 구체적으로 언급한다든가, 외무성의 한계에 대한 자조적인 언급 등 충격적인 부분들이 많다.
<동아일보>가 이 소식을 1면 머릿기사 등 3개면에 걸쳐 다뤘고, <세계일보> 등 다른 중앙일간지들도 예외없이 주요면에 주요 기사로 다뤘다. <한겨레>도 ‘북한체제의 특성을 고려할 때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정부 당국자의 지적을 덧붙이긴 했지만, 자정 이후 제작하는 서울판 2면에 2단으로 다뤘다. 이 기사는 <인터넷한겨레>에서도 25일 0시부터 09시까지 초기화면에 주요하게 배치되었다.
그러나 칼린의 글은 허구였음이 확인됐다. 이 글은 애초 지난 14일 워싱턴에서 브루킹스연구소 등이 주최한 세미나에서 발표한 것이다. 칼린은 이날 “(가상 상황을 상정해 칼럼을 자주 쓰는)<뉴욕타임스>의 윌리엄 새파이어(77)처럼 김정일의 입장에서 발표해봐라”라는 주최 쪽의 제안을 받고, 지난 7월 북한이 재외공관장회의를 열었던 상황을 빗대서 “강 부상의 처지에서 북한이 처한 상황을 그려본 것”이라고 밝혔다. 세미나 발표자로 나섰던 임원혁 박사 등 현장에 있었던 이들은 “발표가 너무나 사실적으로 묘사돼 몇몇 청중이 원본과 출처를 묻기도 했”지만 다들 사실로 보지는 않았다고 전했다. ‘강 부상의 연설문’이 칼린의 글을 통해 노틸러스연구소 사이트에 게재됐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서울의 기자들이 이런 전후 맥락이나 칼린의 글이 세미나에서 발표된 사실을 모른채 이 글을 보면서 오해가 시작됐다.
한국언론들이 자신의 견해를 강 부상의 연설문으로 대서특필한 얘기를 전해들은 칼린은 워싱턴의 한 한국기자에게 “한국 언론들의 착오가 있었지만 그로 인해 북한(외무성의 견해와 처지)에 대한 (‘자유낙하하는 토끼들’로 비유한)문제제기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다면 좋은 일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또 “자신의 글을 강 부상의 편지로 오해한 한국의 기자들과 편집인들이 자신들의 실수에 대해 그냥 웃고 넘어가주길 바란다”고 전했다.
한편, 일부 매체는 노틸러스연구소 홈페이지에 실린 “The views expressed in this article are those of the author”, “Essay by Carlin” 등의 표현을 들어 신문들이 ‘치명적 오독’을 했다고 지적했지만, 이는 적절치 않다. 앞의 문구는 연구소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 개인의 견해임을 밝힌 것이고, 이 연구소는 전문가가 보내온 학술논문을 일반적으로 ‘에세이’라고 표현한다. 두 문구가 ‘허구’의 근거는 아니다.이제훈 기자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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