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11.22 19:24
수정 : 2006.11.22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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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규찬/한국예술종합학교 방송영상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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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규찬/한국예술종합학교 방송영상과 교수
현재 지역방송은 국가의 정책이나 사회의 관심, 학계의 논의 바깥에 있다. 통신·뉴미디어와 유착한 지배담론이 ‘비호감’으로 낙인찍은 과거완료형, 낡은 것이다. 지역방송의 위기에 대해 우리가 태연하고 무심할 수 있는 이유다. 지역방송이 아닌, 바로 이런 후진 의식이 더 위태롭다. 지역방송의 불안한 사정, 긴급한 형편에 무지하기에 그토록 매정할 수 있는 것인가? 경쟁력의 이름으로 비판하고, 효율성의 명분으로 지도하며, 통폐합의 논리로써 징계한다. 서울의 합리와 동떨어진 비합리적 관리·청산 대상쯤으로 쉽게 간주된다. 서울중심주의의 편견은 이토록 질기고 무섭다. 구조화한 착각과 오해, 망상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한 우리에게 지역은 비실제의 이미지일 따름이다. 텅 빈 폐허, 황무지다. 유령 같은 추상이다. 진보적인 미디어활동가·문화운동가라 자칭하고, 학생들에게 방송의 공공성에 관해 뻔질나게 떠들면서도, 막상 지역방송과 진지하게 대면해 본 기억이 내게는 멀다. 디엠비 논란이 시끄러울 때, 지역 방송노동자들이 왜 사업자 선정방식에 그토록 목청 높이는지 솔직히 이해하지 못했다. 광역화 이야기가 유행할 때도, 경쟁력 없고 효율성 떨어지는 ‘시골’의 방송사들을 깔끔하게 정리할 개혁적 조처쯤으로 쉽게 생각했다.
최근 지역방송대상에 출품한 강원, 경상, 전라, 제주, 충청의 수많은 작품들을 심사하면서, 저열한 편견과 게으른 의식은 보기 좋게 쪼개진다. 지역방송의 저력. 방송을 서울에서만 찾고, 방송을 서울에서 이야기하며, 방송을 서울에서 결정하려는 고정관념·관습에 대해 지역의 제작자들이 휙휙 망치를 내두른다. 물론 지역에도 못난 피디, 게으른 기자들이 있다. 지리멸렬한 프로그램들도. 그러나 서울은 어떤가? 따지고 보면 나태한 피디, 자격 미달의 기자들 중 훨씬 많은 수가 서울에 몰려 있지 않나? 진실을 억압하는 뉴스, 시대의 흐름으로부터 이탈한 프로그램들이 서울에 세고 셌지 않은가? 여의도의 방송인들을 도매로 비난할 의도는 없다. 하지만 삼척, 청주, 울산, 여수, 목포에 거주하면서 죽어가는 자연, 해체되는 사회, 붕괴되는 문화와 분투하는 이들에 비하면 너무 대접을 받아 온 게 아닌가? 비교도 안 될 여건과 배척의 구조 속에서 거세된 얼굴, 부재 처리된 언어, 망실된 기억들을 책임지는 지역방송에 비해 돈만 잔뜩 들여 부풀어진 서울의 방송은 좀더 하향 평가되어야 하지 않을까? 중앙방송이 독점해 온 물질적·인식적 특권, 지역방송에 갖다 붙인 선입견을 떼버리고 냉정하게 한번 따져보자.
대구문화방송이 남긴 <0번 버스 이야기>에 합승해 시골길로 나선다. 수다스러운 리포터를 앞세우고 저녁 안방을 들이닥치는 서울의 오만한 카메라와 차원이 다른 문화생산의 규칙, 미학의 코드를 체감할 수 있다. 청주방송의 책 읽어주는 라디오도 귀 기울여 볼 만하다. 서울 어느 문화예술 프로그램보다 지적인 마산MBC의 다큐멘터리 <건축 이젠 디자인이다>, 농민들로 하여금 한미자유협정을 갖고 놀도록 배려하는 <얍! 활력천국>와 같은 정규프로그램도 보기에 참 좋다. 천편일률의 서울 티브이에 비하자면, 지역 티브이는 훨씬 더 다성적이고 그래서 풍성하다. 이런 문화공간을 위축시키거나 망실되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공공영역을 소박한 삶의 무늬들로 채우는 지역방송의 생태적 가치를 정확히 인정한 상태에서, 방송이 지역살림의 중대한 역할을 제대로 행할 수 있도록 조건을 터줘야 한다. 발랑 까진 서울의 집중된 텔레비전과 구별되는 인간적 체취의 산포된 지역방송은 결코 과거가 아닌 미래의 대안이다. 다양한 공동체의 울타리, 다기한 정체성의 주춧돌인 지역방송을 되살리기 위한 인식의 급변, 정책의 개입, 운동의 기획이 필요하다. 당장.
전규찬/한국예술종합학교 방송영상과 교수
eunacom@knu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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