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11.30 14:51
수정 : 2006.11.30 14:51
"안티"라는 말은 고무공처럼 반발하며, 신문 얘기를 너무 자주하는 건 지겨울 수도 있다.
사실, 내 돈을 내고 종이신문을 구독한 거라고 해봐야 이제 고작 1년이다. 회사에 다닐 때는 언론재벌지와 경제지와 스포츠신문이 대충 섞여서 들어왔고(언론재벌보수지/경제지/스포츠지, 이것들 사이에 변별력이라는 게 있을까?), 회사에 다니지 않을 때도 인터넷 포털에 들어가면 온갖 뉴스가 가득했으며, 심지어 버스가 신호등에 걸릴 때마다 저 건너 빌딩 전광판에서 뉴스가 깜빡였다. 한달 구독료도 적은 돈이 아닌데(--) 그 돈으로 책을 사보거나 영화라도 보거나 하다못해 영양보충을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건 여전히 그럴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쩌다 신문을 구독하기 시작한 거지? 아마 포털의 선정성에 질려버렸을 것이다. 가벼운 것일수록, 내용이 없는 것일수록, 물 위로 빠르게 떠올라 수면을 장악하고 와글대는 모습에 넌더리가 났을 것이다. 남들이 많이 본 뉴스를 클릭하고 있는 내 손가락이 지겨워졌을 것이다. 인터넷 대안뉴스 사이트들도 죄다 시들해질 무렵이었다.
그래서 종이신문을 신청했다. 보급소가 통합됐는지, 이 동네만 그런 건지, 어느날부턴가 엄마가 보는 부자신문과 내가 보는 가난한신문이 한 묶음으로 들어온다. (별일일세!!) 그래도 부자신문과 가난한신문은 역시나 격이 다르다. 부자신문은 비가 올 기미가 눈꼽만치만 보여도 비닐을 씌우는데, 가난한신문은 비가 웬만큼 오지 않아서는 좀처럼 비닐을 씌우지 않는다. 1년 동안 가난한신문이 비닐에 싸여 들어온 건 딱 두 번뿐이었다. 그리고 딱 손에 쥐었을 때의 부피감이 다르다. 신문의 면수가 다를 뿐더러 끼어져 들어오는 찌라시의 양이 다르다. 엄청나게 다르다. 같은 돈내고 보는 건데 역시 두둑한 게 좋을 것 같다. 그래도 가난한신문은 찌라시가 후두둑 떨어지는 걸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걸 뽑아서 버리는 수고를 덜어준다. 1시간 남짓한 출근길에 대충 훑을 수 있을 만큼 분량도 적당하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아침마다 가난한 신문을 들고 버스에 오른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내가 이들의 논조에 너무 물들어버린 건 아닐까 문득, 의심이 들었다. 그건 "대체로" "큰" 문제가 될 건 없긴 하지만 편편찮은 마음에 신문을 덮는 일이 확실히 줄었다. 전에는 대단히 불편했던 아무개씨의 칼럼마저 아무렇지 않게 읽어낸다. 어쩌면 내가 이제 (더더욱) 많은 것에서 마음을 접고, 떼고, 그저 구경으로서만 세상을 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마음으로 편들지 않고, 마음으로도 힘 싣지 않고, 별 생각 없이, "그러면 그런가보다, 그러니까 그런거겠지"하는 태도로 신문지를 넘기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부지불식간의 흡수와 동화 때문에, 그 사람이 어떤 신문을 보는가는 그 사람의 사고방식과 더욱 밀착된다. 게으른 사람들은 한 번 익숙해지면, 자기도 모르는 새 뭔가에 익숙해져버리면, 그것의 정체와 본질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이에 익숙해져버리면, 골아떨어진 문제의식을 깨워 일으켜 익숙해진 그것과 결별하기가 쉽지 않다. 하루하루 더 어렵다. 그것은 어느새 내 생각을 지배하고, 내 생각의 주파수를 조종한다. 세상을 보는 창은 결국 세상을 보는 시선이다. 그 창으로 재단된 것을 결국 세계관으로 갖게 된다. 어느새, 나도 모르는 새 슬며시, 가랑비에 옷 젖듯 서서히. 언젠가 말했듯이, 하나의 단면으로 전체를 파악하려고 드는 것은 무모한 짓이지만, 나는 그 사람이 보는, 그리고 "신뢰하는" 매체는 그 사람의 상당부분을 짐작하게 해주는 키워드라고 믿는다. 예전에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지금은 확신한다. 그리고/그래서 나는 대화를 나누다가 슬쩍 물어본다.
당신은 어떤 신문을 보시나요?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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