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2.14 21:34
수정 : 2007.02.14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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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규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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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전망대
문화방송 〈뉴스데스크〉가 시청률에서 호조를 보이는 모양이다. 시트콤의 효과인지, 아니면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한다는 〈주몽〉 탓인지 잘 모르겠다. 프로그램 내적인 성공 비결이 더 궁금하다. 〈뉴스데스크〉는 어떻게 시청자의 눈길을 끌고 붙잡을 수 있었을까? 결론부터 말할 때, 포맷 개편 등을 통한 ‘친절하고 깊이 있는 뉴스’ 제공의 결과라는 자화자찬식의 해석에 개인적으로 동의할 수 없다. 가볍고 재미나는 정보 제공의 서비스에는 친절했는지 몰라도, 권력을 감시하고 여론을 반영하며 의제를 설정하는 서비스는 부진하다. 〈뉴스데스크〉가 공동체 보도기구로서의 위신은 갖추었을지라도, 사회적 교통기관으로서의 역능은 아직까지 턱없이 부족하다. 흔히 텔레비전 뉴스에 대해 세상을 재현·구성하는 의미·이념의 매개체라고 한다. 현실을 일정한 틀, 특정한 서사양식에 따라 이야기하는 선택적 해설가라는 뜻이다. 과연 〈뉴스데스크〉는 세계를 우리에게 어떻게 안내해주고 있나?
‘초동대처 부실과실조사’, ‘7명 더 살해했다’, ‘연쇄충돌 33명 사상’, ‘안전벨트 없었다’, ‘부실한 여행자 보험’, ‘여승무원 나이제한 철폐’, ‘전문직만 여성 돌풍?’, ‘도둑 심야보다 초저녁’. 지난 12일 〈뉴스데스크〉는 이런 제목들로 이야기를 푼다. 단순화하자면, 이날의 동정은 사건·사고와 여성이라는 두 가지 소재로 정리된다. 출입국관리사무소 화재 참극으로 시작한 것까지는 좋다. 이후 앵커는 사형선고 받은 연쇄살인범이 사람을 더 죽였다는 이야기, 교회버스 휴게소 연쇄충돌, 뉴질랜드 한국관광객 교통사고, 연예인 죽음 등의 이야기를 연쇄적으로 소개한다. 시청자의 흥미를 끌기에 딱 알맞다. 국내 항공사들의 여승무원 나이제한 철폐 소식이 ‘전문직, 여성돌풍’ 뉴스와 함께 친절히 제공되고, 건강과학·사회· 경제·정치·통일외교 분야의 다양한 뉴스들이 잇따른다. 그럴듯하게 구색을 맞춘 것 같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허접하기 짝이 없다. 우선 이날의 세계 뉴스는 ‘이북 김정남, “영어 좀 합니다”’라는 것 하나가 고작이다. 전지구화 시대, 〈뉴스데스크〉의 세계관은 이토록 우물 안 개구리 격으로 협소하다. 지구온난화, 전쟁과 기아, 신자유주의와 대안 세계화의 복잡현실을 해석해 내기에는 한마디로 역부족이다.
좁은 시선, 얕은 지성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보도에서도 치명적으로 드러난다. ‘일괄타협’이 있을지도 모를 7차 협상이 당일 시작되었다. 〈뉴스데스크〉는 겨우 끄트머리에 ‘에프티에이 협상, 이번 주가 분수령’이라는 현지발 아이템 하나를 배치한다. “7차 협상이 끝나면 협상 타결 가능성을 말할 수 있을 것”이나, “주요 쟁점에서 균형점을 찾을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란다. ‘반대집회 강행’이라는 묘한 뉘앙스의 단신을 앵커가 읊는다. 푸대접이 심하다. 의식적 축소, 현실 은폐다. 전국언론노조 위원장과 70여 지부장들이 보도의 실패를 사죄하며 단식에 들어간 그날 저녁의 모습이기에 더욱 유감이다. “제발 국민들이 한-미 에프티에이 실상과 문제점을 제대로 알 수 있도록 ‘있는 그대로’ 보도해” 주라는 간곡한 호소에 어찌 이리 냉담할 수 있는지 안타깝다. 이렇게 내부 목소리에조차 귀막으며 〈뉴스데스크〉가 시청률을 끌어올렸다고 해서, 진실 발언의 책무를 외면함으로써 경쟁에서 설혹 승리한다고 해서 그게 저널리즘 진화와 민주주의 성장에 무슨 실익이 있겠는가? 뉴스 흥행경쟁의 성공, 저널리즘 수행윤리의 실패. 〈뉴스데스크〉만의 특수한 현상이 아니기에 더욱 위태롭게 느껴진다.
전규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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