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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2.21 20:46 수정 : 2007.02.21 20:46

김재영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미디어 전망대

‘쉼표’를 처음 접한 때는 아마도 초등학교 음악시간이었을 것이다. 음악에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몇 박자를 쉬어야 할 때가 있다. 당시에는 쉼표가 음악의 일부임을 알지 못했다. 음악은 그저 ‘음표’들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쉼표 없이는 음악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그래서 쉼표도 음표와 동등한 구실을 한다고 깨달은 것은 제법 철이 든 이후다.

설 명절 잠시나마 언론은 쉼표를 찍었다. 신문은 3일 연휴 기간 중 이틀을 휴간했고 텔레비전 시청은 지난해보다 30분 이상 줄었다. 인터넷 이용도 10대들의 이용도가 높은 게임을 제외하곤 전반적으로 하락한다고 한다. 한마디로 명절 연휴는 언론이 생산하는 콘텐츠에 노출되는 시간이 최소화되는 때다.

언론과의 접촉(매스커뮤니케이션)이 줄어든 만큼 그 시간을 채우는 것은 사람들 간의 만남과 대화(대인커뮤니케이션)다. 안부와 덕담에서 생활과 세상에 이르기까지 소재에 제한이 없다. 명절 연휴는 이른바 대인커뮤니케이션(쉼표)이 매스커뮤니케이션(음표)을 제압하는 유일한 기간인지도 모르겠다.

음악에 대해 알면 알수록 여백을 주면서 감동을 극대화하는 쉼표의 중요성을 절감한다. 그렇듯 언론을 접하면 접할수록 그것이 내뿜는 뉴스정보에서 벗어나는 게 가치 있다고 느끼게 된다. 언론을 통해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더 많이 알 수 있을지언정 그것이 곧 우리 주변을 더 풍부하게 이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언론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사람일수록 세상은 실제보다 위험한 곳이며 자신이 폭력이나 사건·사고에 휘말릴 가능성이 크다고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미국에 ‘아미시’라는 공동체 마을이 있다. 이들은 언론을 접하지 않는 것은 물론 전기조차 사용하지 않는다. 현대의 물질문명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삶을 실천한다. 이들은 자전거보다 열 배나 빠른 자동차가 있고, 도서관을 찾아다녀도 구하기 힘든 자료를 인터넷으로 불과 몇 초 만에 얻을 수 있는데 왜 우리는 매일 밤늦은 시각에나 집에 들어가 잠자는 아이의 얼굴만을 봐야 하냐고 묻는다. 아미시들에게 언론은 정보 습득이나 여가 선용을 위해 존재하는 물건이 아니다. 단지 소비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 결과 사람들은 더 좁은 평수지만 비싼 집을, 굳이 필요하지 않지만 폼 나는 자동차를 삶의 목표로 삼게 되었다고 판단한다.

연휴 동안 짬짬이 들여다본 텔레비전에서는 올해도 어김없이 ‘맹탕’ 특집물이 넘쳐났다. 틈틈이 뒤적인 신문도 명절음식 ‘재활용’하기처럼 그 나물에 그 밥이었다. 대통령의 외국순방 중 발언 한 토막(“북한이 달라는 대로 다 줘도 남는 장사”)을 쏙 뽑아내 “대대적인 대북 지원을 시사”(〈동아일보〉 17일치 1면)하는 것이라는 냉전적 소설 쓰기에도 너나가 없었다. 상지대 소송과 관련해서는 친정부 인사들이 분규 중인 사립대학을 ‘제멋대로’ 주무른다고 부풀리고(〈조선일보〉 16일치 8면) 사설에서 ‘임시이사제는 권력이 사학을 빼앗아가는 폭력 수단’(27면)이라는 수구적 시각을 재탕했다.

연휴가 끝나면서 아미시를 떠올린 까닭은 다시 음표가 쉼표를 대체하는 데 따른 아쉬움 때문만이 아니다. 시대가 변해도 음표는 변하는 법이 없어, 똑같은 레퍼토리만 읊조리는 언론에 대한 인내가 임계점에 이른 탓이다.

김재영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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