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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한표 / 언론인·전 〈한겨레〉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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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전망대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보복 폭행’ 의혹을 보도하는 과정에서 한국 언론의 고질적인 문제들이 또 드러났다. 익명보도의 남발과 피상적인 보도 경향이 그것이다. 〈연합뉴스〉가 사건 발생 47일 만인 4월 24일 ‘모 대기업 A회장과 아들 B씨’라는 익명으로 처음 보도한 이후 비슷한 익명보도는 27일치 〈한겨레〉가 이를 실명으로 보도하기 전까지 이어졌다. 익명보도는 명예훼손 소송의 위험을 피하기 위한 언론사와 기자들의 자기보호 수단으로 통용되고 있다. 공인이 아닌 보통사람들이 사건에 연루되었을 경우 익명보도는 공익적인 의미도 갖는다. 문제는 이것이 남발되는 가운데 보도가 치열한 사실 확인 대신 익명이라는 손쉬운 방식으로 흐른다는 데 있다. 김 회장 사건을 익명으로 보도한 이유로 기자들은 가해자가 부인하고, 경찰도 확인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형법 309조 1항은 출판물 등에 의한 명예훼손죄가 ‘비방의 목적’이 있어야 성립하는 범죄라고 규정하고 있다. 대법원 판례도 보도내용이 진실이거나 진실이라고 믿을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경우 무죄를 선고하고 있다. 특히 ‘진실이라고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에 대해 대법원 판례는 기자가 보도 내용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하여 적절하고도 충분한 조사를 다하였는지를 기준으로 판단하고 있다. 기자가 사건을 취재한 결과 진실이라는 믿음이 생기지 않아 익명보도를 할 정도면 차라리 보도를 미루는 것이 옳다. 기자들이 밝히고 싶지 않은 익명보도의 진짜 이유는 언론사 경영이 전적으로 의존하다시피 하는 대기업 광고의 위력 때문이다. 실제로 대기업이 언론사나 기자를 명예훼손죄로 고소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들에게는 광고라는, 법보다 훨씬 강력한 무기가 있기 때문이다. 실명보도로 전환한 뒤 언론은 보도의 초점을 재벌 아버지의 빗나간 자식 사랑과 재벌에 약한 경찰 수사의 문제점에 맞추고 있다. 경찰이 본격적인 수사를 미룸으로써 증거 확보가 어렵게 되었다는 언론의 비판은 당연히 있어야 한다. 그러나 언론은 경찰을 비판하면서도 경찰 수사에 의존하는 보도행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경찰 수사 과정만을 쫓아다니는 경마식 보도로는 시간이 흐른 뒤 경찰 수사가 흐지부지 잦아들면, 보도 역시 잦아들 수밖에 없다. 언론은 경찰이 아니라 언론 자신의 시각으로 사건에 접근해야 한다. 언론이 주목해야 할 부분은 공권력을 대신하려는 사적 권력이 우리 사회에 이미 형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식의 소박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번 사건의 실체적 진실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경호원이라는 사람들이 단순히 ‘경호’만 하는 것이 아니라 법을 대신해 ‘응징’에도 나설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이미 충분히 드러났다. 이 부분을 언론은 놓치고 있다. 김 회장 경호원의 규모와 업무 및 충원과정, 그리고 우리나라 대기업의 경호시스템 실태 등이 언론의 보도로 밝혀져야 할 부분이다. 공인에 대한 언론 보도는 실명이 원칙이다. 그러나 현재와 같이 언론사의 경영구조가 취약한 상태에서 이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건다는 결단이 필요하다. 이것은 언론사와 기자들에게 주어진 특권, 곧 남을 비판하고, 국가적 의제를 설정할 수 있는 특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비용이다.성한표 / 언론인·전 〈한겨레〉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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