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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호/ 언론개혁시민연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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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전망대
진실을 두려워한 유신정권은 언론에 재갈을 물렸다. 언론의 숨통을 죄고 있던 중앙정보부를 지칭하기조차 겁나 ‘남산’이라고 불렀다. 이른바 ‘기관원’들이 언론사에 상주하며 보도지침을 잘 수행하는지 감독하며 편집국장과 진배없는 노릇을 했다. 그 말고도 보안사, 치안본부에서 나온 기관원들이 기자들의 동태를 파악한다며 감시의 눈을 번득였다. 보도관제의 첫 과녁은 유신체제에 항거하는 시국사건이었다. 동아일보, 한국일보에는 뜻있는 기자들이 지면에서 사라진 기사를 찾으려 밤샘농성을 벌이곤 했다. 그 소리가 권부의 귓전에 울리기나 했나 싶다. 유신 두 돌을 맞는 1974년 10월 두 신문사 기자들이 사전검열에 조직적으로 저항하고 나섰다. 그 외침이 들불처럼 언론계에 퍼져나갔다. 그것이 10·24 자유언론실천운동이다. 그에 앞서 그해 3월7일 동아일보 기자 33명이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이것이 113명이나 무더기 해고되는 동아투위 사태의 발단이다. 이어 12월10일 한국일보 기자 31명이 노조를 만들었다. 정·부위원장이 쫓겨난 채 법외노조로서 법정투쟁이 이어졌다. 하지만 1980년 신군부에 의해 그 깃발이 찢겨지고 말았다. 언론투쟁을 위한 결속력을 다지고 신분보장을 받으려는 뜻이 무너져 버린 것이다. 1980년 5월 광주를 피바다로 만든 신군부는 그 손으로 언론인 800여명을 잘랐다. 약간이라도 비판적이면 이 잡듯이 골라내 목을 쳤던 것이다. 많은 동료들이 삭풍에 내몰렸건만 언론은 표변하여 서로 뒤질세라 전두환을 구국의 화신으로 떠받들기 시작했다. 목이 터져라 칭송가를 부르던 인사들은 언론통제에도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출세의 가도를 달렸다. 1987년 6월 항쟁이 암흑기를 닫는 여명을 여는 듯했다. 땡전 뉴스로 귀가 마비됐던 언론계에도 각성의 소리가 들리나 싶었다. 여기저기 노조 깃발이 나부끼고 부끄러운 날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편집국장 직선제·동의제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방송장악이란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한 정치권력의 반동은 잠들지 않았다. 한국방송의 1990년 방송민주화 투쟁, 문화방송의 1992년 공정방송 쟁취파업이란 불을 지폈던 것이다. 언론노조에서 회계부정 의혹이 불거졌다. 신임 집행부가 확인한 바로는 3억원 가량은 실무자가 횡령한 게 확실하고 불분명한 지출이 있었나 보다. 투쟁기금 따위가 말이다. 선명성이란 기치만 좇다 투명성을 잊은 모양이다. 모두 통렬하게 반성하고 성토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범법 행위와 관리 부재를 구분하지 않은 채 수구언론에 새고 검찰의 손으로 넘어갔다. 생명처럼 소중한 도덕성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그것도 공권력을 불러들임으로써 자주성과 독립성에 치명적 타격까지 입게 됐다. 어느 조직이나 세력 다툼은 있기 마련이다. 이해와 설득으로 봉합하면 된다. 하지만 노선갈등이라면 존재가치를 위협한다는 사실을 깊게 깨달아야 한다. 언론노조 강령은 언론운동 역사의 승계를 선언하고 있다. 언론노동자의 정치·경제·사회적 지위향상과 함께 말이다. 신문산업 진흥을 위한 신문법 제정, 공공성 확보를 위한 방통법 제정, 한-미 자유무역협정 반대는 그 투쟁의 일환이다. 노선투쟁은 강령을 떠나서 유신체제에 도전하며 면면히 이어온 전통성을 부정하는 행위다. 언론노조의 내홍과 갈등을 누가 좋아할지 잘 알지 않나?김영호/ 언론개혁시민연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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