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4.14 16:21
수정 : 2005.04.14 16:21
노무현 대통령의 ‘동북아 균형자’론을 비판한 일부 신문의 칼럼이 균형을 잃고 있다. 이들의 비판은 균형자론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동북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태의 복합적인 성격을 지나치게 단순화했다는 점에서 균형을 잃었다. 조선일보의 류근일 칼럼과 김대중 칼럼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류근일 칼럼은 노 정권과 386 세대, 또는 ‘일부 대중’에 대한 노골적인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다. “‘동북아 균형자’론은 과대망상이다”는 제목을 단 지난 5일치 류근일 칼럼은 노 대통령의 균형자론은 386 반미투쟁 세대의 결투신청인 셈이며, “미국과 김정일이 직접 맞붙는 판에 그 중간에 서서 ‘균형자’ 어쩌고 설파해 보았자 벌판에서 혼자 찬바람 맞는 신세”라고 주장했다. 논리적인 비판이라기보다는 욕설에 가깝다.
이 칼럼에서 류씨는 “노 정권과 일부 대중은 한미 동맹만 벗어나면 중국 러시아 북한은 물론, 미국 일본도 우리를 자주국가로 엄청 높이 존중해 줄 것처럼 자아도취하고 있다”고도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이보다 앞서 지난달 30일 정부관계자가 균형자론에 대해 한 설명을 무시한 것이다. 정부관계자는 균형자론은 “한미 동맹을 이완시키거나 부정하는 게 아니라 한미 동맹을 토대로 한 것”이라고 설명했었다.
류씨의 지난 달 22일치 칼럼은 “노무현 정부와 반미세대는 능력 있으면 서양 오랑캐 척결, 대마도 정벌, 간도 회복이라도 해 볼 일이지만, 그럴 실력이 없다면, 현실을 직시하고 우리를 그래도 이만큼이나마 버티게 해 준 ‘동맹외교’라도 건져내라”고 주장했다. 논리적 비약과 사고의 경직성이 칼럼이라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하다.
“노대통령, 독일에서 무엇을 볼 것인가”라는 제목의 지난 12일치 김대중 칼럼은 균형자론에 대해 “좋게 말해 동북아의 상황과 한국의 처지를 난감해 하는 탄식에서 나온 궁여지책이고, 비판적으로 보면 EU식도 안 되고 그렇다고 ‘맨손 자립’도 아닌 엉거주춤 상태를 반영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의 해석은 상황을 비관적으로 보고 소극적으로 대응할 때 흔히 빠질 수 있는 패배주의적 관점을 반영하고 있다.
그가 이런 관점을 갖게 된 것은 상황의 복합적 성격을 무시하고 이분법적으로 단순화시킨 결과라는 것이 이어지는 문맥에서 드러난다. 그는 “중국과 일본에 끼인 우리의 선택은 속된 말로 강한 쪽과 연계해서 세계의 블록화 또는 편짜기에 가담할 것인지, 아니면 노 정권의 실세들이 강하게 매달리는 개념으로 이쪽저쪽에도 붙지 않는 ‘자존’으로 갈 것인지의 두 가지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자의적 해석과 상황의 지나친 단순화보다 더 큰 문제점을 이들 칼럼이 갖고 있다. 그것은 정부로 하여금 균형자론이라는, 듣기에 생경한 정책을 모색하게 만든 배경, 다시 말하면, 불안정하고 엄혹한 동북아 정세에 어떻게 대응하느냐 하는 고민이 없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고민을 공유하면서 칼럼이 좀더 진지한 논리로 균형자론을 비판했다면, 균형자론의 심화와 비판적 수용, 또는 수정을 위한 토론을 이끌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균형자론은 미국과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주변 열강을 다루는 과정에서 나온 외교론이며, 미완의 정책이라 할 수 있다. 균형자론이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토대로 한다는 정부 쪽의 설명도 사실은 논리적 모순이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논리적 모순이 오히려 상황의 복잡성을 입증한다.
미국과의 전통적인 동맹관계가 깨어져서도 안 되고, 그러면서도 오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이 끝난 뒤 어느 시점부터 미국과 중국이 첨예한 대립관계로 들어갈 때, 우리가 미국 편에 서서 중국과 대립해서도 안 되는 상황, 다시 말하면, 미국과도 잘 지내면서 중국과도 맞서지 않아야 하는 유연한 입장을 견지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여기서 한국은 생존을 위해 사안별 공조가 아닌, 무조건적·일괄적인 공동 보조를 거부할 수 있는 입지를 확보하고 있어야 하며, 균형자론이 이와 같은 입지 확보를 위한 포석으로서 어떤가를 분석하는 것이 균형자론 비판의 균형 잡힌 시각일 것이다.
성한표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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