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0.12.15 09:05
수정 : 2010.12.1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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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한표 언론인·전 <한겨레>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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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비론. 맞서서 내세우는 두 말이 모두 틀렸다는 주장이다. 아이들이 싸울 때 우리는 우선 싸움부터 말리기 위해 일단 둘 다 나무라게 된다. 아이들 싸움만이 아니다. 분쟁이 일어났을 때 대부분 어느 한 당사자만 잘못했다고 판정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양비론은 나름대로 유용하게 쓰이기도 한다. 하지만 양비론은 분쟁에서 누구의 책임이 더 큰지를 가려내는 일을 피하고, 대립하는 상황 자체를 비난함으로써 사회발전을 가로막는다.
양비론이 가장 흔히 등장하는 곳이 국회다. 국회는 여야로 나뉘어 있고, 이들은 사사건건 대립한다. 국민 사이에 계층별이나 지역별 이해관계가 대립하고 있기 때문에 여야가 대립하는 것은 정상이다. 대립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하지만 국민들은 여야가 대립하게 만든 쟁점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대립 자체에 대해 짜증을 낸다. 대립의 원인을 제공한 쪽을 비판하는 것이 정상인데도, 국회는 항상 싸움만 한다고 비판하면서 정치 불신을 강화한다. 언론의 양비론이 만들어 놓은 기이한 현상이다. 일부 언론은 지난 8일 한나라당이 예산안과 여러 주요 법안들을 날치기 처리했을 때에도 양비론을 유감없이 구사했다.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이날의 주요 문제는 날치기 처리이고, 폭력사태는 이에 따른 부작용이었다.
그러나 양비론은 문제의 초점을 날치기 처리로부터 국회 폭력사태로 바꿨다. 일부 신문의 지난 9일치 사설이 그렇다. <조선일보>는 “‘4대강 예산 졸속처리 저지’를 내세워 막무가내로 국회의 발목을 잡은 야당도 문제지만, 여당의 강행처리에도 생각해 볼 부분이 있다”고 주장했다. 양비론을 펴면서도 비난의 무게를 야당에 더 실었다. 야당은 ‘문제’이고, 여당은 ‘생각해 볼 부분’이라는 식이다. “여당의 욕심, 야당의 위선”이라는 <동아일보> 사설의 제목 역시 양비론의 전형이다.
<중앙일보> 사설은 신문들이 곧잘 쓰는 형식적인 균형조차 내던져 버렸다. 사설은 “이번 사태에 대해 야당 쪽에 먼저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고 야당을 꾸짖었다. 사설에는 ‘날치기’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이번 사태는 “고함과 점거, 충돌과 파괴 속에서 새해 예산안이 통과”된 것으로 정리했다. 그러고는 “김정일을 향해 고함을 치고 돌을 던져야 할 의원들이 서로를 향해 소리치고 멱살을 잡았다”고 외쳤다.
정치적 양비론은 인터넷 언론에서는 발붙이기 어려운 상황이다. 하지만 나이 든 사람들 중에는 아침신문을 보는 것으로 자신의 의견을 정하는 이들이 많고, 보수적인 신문들인 ‘조중동’의 영향력이 아직도 살아 있다. 그래서 젊은이들과 나이 든 사람들 사이에 의식의 양극화가 점점 심해진다. 의식의 양극화는 양쪽 모두로부터 균형감각을 앗아가는 해악을 끼친다.
양비론은 우리 생활 전반에서 활개친다. 우리는 누구나, 어떤 일이든지 양비론적인 적당주의에 물들어 있다. 양비론이 잘 먹혀들 수 있는 상태다. 우리에게는 너그러움에 가치를 부여하고, 시비를 가리려는 태도를 쫀쫀하다고 비난하는 경향이 있다. 꼬리만 자르고 몸통은 보호하는 관행이 너그러움이라는 허울을 쓰고 횡행하기도 한다.
하지만 너그러움과 양비론은 다르다. 너그러움은 원래 시비를 덮자는 태도가 아니다. 시비를 가리려는 태도야말로 합리적인 사회를 만드는 지름길이다.
성한표 언론인·전 <한겨레>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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