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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1.24 19:12 수정 : 2006.01.25 17:35

신문사 무리한 확장 요구…지대 못메워 적자 악순환
3곳서 지국계약 해지되자…신불자 전락 끝내 삶 포기


종합일간지 지국장의 지난달 자살사건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신문시장의 과도한 판촉경쟁이 다시 도마위에 오르고 있다.

지난해 12월22일 오전 10시36분 서울 은평구 갈현동의 한 식당 안에서 신문 지국장 박정수(당시 45살)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박씨가 숨진 이 식당은 아내 김입분(47살)씨가 돈가스 가게를 운영하다가 장사가 안 돼 지난해 7월 문을 닫은 곳이었다.

박씨는 12월14일 사무실에 남긴 유서에서 “어머님 아버님 죄송합니다. 여보 할 말이 없구요. ○○, ○○아 아빠가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라고 썼다고 부인은 전했다. 발견자와 가족들을 조사한 경찰은 의문점이 없는 단순 변사 사건으로 종결 처리했다.

박씨는 서울시 은평구 갈현 지역의 신문 지국장이었다. 지난 83년께부터 신문사 지국에서 직원으로 일하기 시작했고, 92년부터는 동아일보사 지국장이 돼 최근까지 4개 신문사 지국을 운영해왔다. 그러나 20년이 넘게 신문지국에 몸담아온 박씨와 그의 가족에게 남은 것은 1억5천여만원의 빚과 부부 동반 신용불량자라는 멍에뿐이었다.

4개사 지국 가운데 3곳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그를 떠났거나 떠날 예정이었다. 2004년 11월 대형사인 동아일보사가 지국 계약을 일방적으로 해지(보통 ‘강제접수’라고 함)했고, 2005년 10월엔 서울신문사도 박씨와의 계약을 해지했다. 매일경제신문사와는 11월16일 “12월12일까지 지대(신문대금) 미수금(853만원)을 완납하지 못하면 지국 반납을 약속한다”는 내용의 각서를 썼다. 박씨는 매일경제 직원이 다시 다녀간 다음날인 12월14일 배달을 마친 뒤 실종됐다.

박씨는 왜 지국을 운영하면서 적자에 허덕였을까? 부인 김씨에 따르면 생전에 김씨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신문사들의 무리한 독자 확장 요구였다. 이를테면 박씨의 지국에서 독자 200명을 확장하려면 확장요원·경품 비용을 합해 1부당 5만~7만원씩 모두 1천만원이 넘는 돈이 들었다. 그러나 본사의 지원금은 적거나 거의 없었고, 확장 독자에겐 3~6개월 동안 무료로 신문을 배달해야 했다. 확장 독자가 유료로 바뀌어도 구독 기간은 1년을 넘지 못했다. 한 마디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으나, 본사의 요구와 경쟁 지국을 생각하면 안할 수 없었다.

최후까지 박씨를 고통스럽게 한 또 다른 문제는 신문사들이 요구한 높은 지대(신문 대금)였다. 신문에 끼워 넣는 전단 광고지 시장이 좋은 지역에선 지대가 좀 부담돼도 그럭저럭 지국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박씨의 갈현지국은 광고지 수입이 시원찮았고, 수금액으로 최고 월 1천만원(5개 신문 운영할 때)에 이른 지대를 메우는 것도 어려웠다.


특히 2004년 11월에 해지당한 동아일보사의 지대는 월 700만원에 육박해 지국의 주요 적자 원인이었고, 미납금은 계속 쌓여갔다. 박씨는 지대를 더 깎아줄 것을 요청했으나, 결국 후임자가 없어 1000부에 대한 권리금조차 받지 못한 채 계약을 해지당했다. 부인 김씨는 “남편이 평생 피땀을 쏟아 부은 동아일보사 지국 계약을 해지당한 뒤 1년 동안 자주 울었다”고 전했다.

박씨의 한 동료 지국장은 “젊어서부터 배운 게 지국일이라 다른 일로 바꾸기도 어려웠고, 수금액으로 빚을 돌려 막다 보니 지국을 중단하는 것은 곧 파산을 의미했다”며 중도에 그만두지 못한 이유를 설명했다.

박씨는 집을 나가기 직전인 12월9일 부인 김씨와 함께 서울 중구 명동의 신용회복위원회를 다녀왔다. 두 사람은 2004년 말 지국 운영 과정에서 낸 빚으로 인해 모두 신용불량자가 됐다. 신용회복위는, 부인은 빚 800여만원을 8년 동안 갚아 신용을 회복하고, 남편은 빚 갚기를 포기하고 법원에 개인 파산 신청을 내라고 권유했다. 박씨는 마지막까지 파산 신청을 위한 변호사 비용 180만원을 구하러 친척·친지들에게 다녔으나, 빌리지 못했다.

박씨는 1960년 전남 해남의 가난한 농가에서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나 어려서 상경했다. 검정고시로 고교 과정을 마쳤고, 대학에도 합격했으나 등록금이 없어 군대에 갈 수밖에 없었다. 제대한 뒤 학원비를 벌기 위해 시작한 신문지국에 그는 뼈를 묻었다. 부인 김씨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어 희망을 포기한 것 같다”며 “좀더 일찍 신문지국을 정리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이라고 말했다.

한편 박씨가 운영했던 대형 신문사인 ㄱ사의 판매국 본부장은 “박씨의 경우 확장을 하지 못해 부수가 2002년 말 1800부에서 2004년 말 1000여부로 급격히 줄었다”며 “지대도 2003년 770만원에서 2004년 642만원으로 130만원을 깎아줬음에도 미납이 발생하는 등 문제가 많아 계약을 해지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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