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3.31 19:28
수정 : 2006.03.31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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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2월 16일 승호 생일날 가족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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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 두 아들에 그리움 남기고 간 남석재씨
“엄마, 꼭 일어나겠다고 아빠가 약속했어. 아빠 살릴 수 있다면 내 거랑 생명 바꾸고 싶어!”
어쩌면 가장 평범했던 사람, 그러나 부인 윤세령(35)씨와 두 아들 승호(12) 지호(8)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사람인 남석재(43·전 ING생명 BEST지점장)씨가 3월7일 간암으로 별세했다. 치료시기를 놓쳐 암과 싸워 볼 겨를도 없이 그는 갔다. 그토록 아끼던 가족과 몸담던 회사를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자신을 다 바쳤다.
경북 의성에서 위로 누나 여섯을 두고 일곱째로 태어난 그는 밑으로 남동생을 맞아 팔남매 속에서 유년기를 시골 고향에서 보냈다. 서울에서 고등학교 졸업 뒤 사정 때문에 대학 진학을 미루고 군에 입대했다. 요즘의 군대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던 80년대 중반 장갑차 분대장이었던 그는 웃음을 잃지 않으며 동료와 부하들에게 장난 걸기를 좋아했다.
둘째 지호가 아빠를 빼닮아 가족들과 제 친구들 웃기기를 좋아하고 병상의 아빠를 위로하기도 했다고 한다. 책 읽기 좋아하고 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제대 후 동국대 국문과에 입학했으나 80년대 중·후반의 대학과 사회의 분위기는 온전히 그를 시나 소설 쓰기에 가둬 놓지 않았다.
신입사원 채용기준 나이를 넘겨 졸업한 그는 당시 고려생명에 입사해 보험업계와 인연을 맺는다. 회사에서 만난 부인과 1년여 열애 끝에 결혼해 큰아이를 낳고 키워갈 즈음, 구제금융 사태로 인한 보험회사 구조조정으로 부부는 일터를 잃는다. 가까운 사람들 보증을 서준 게 잘못돼 반지하 월셋방으로 내려앉아야 했다. 하지만 당시에도 그는 부인과 큰아이에게 예의 그 장난기 어린 눈빛과 함께 밝은 얼굴을 보여주려고 무진 애썼다고 부인은 기억한다.
새로 옮긴 아이엔지생명에서 조금씩 안정을 찾아 셋방에서 임대아파트로, 둘째 지호를 보고 한참 후에야 빚을 모두 갚고 상계동에 전세아파트를 마련했다.
암과 싸우기 전까지 그는 운동광이었다. 야구를 좋아해 직장 동호인 야구에 주말마다 빠지지 않았다. 수영도 수준급이었다. 한번 시작하면 만족스러울 때까지 끝을 보는 성격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만큼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이런 그가 병상에서 끝내 일어서지 못하자 그를 높이 평가하던 회사는 거액의 연봉을 추가 지급하였고, 동료 지점장들은 두 아들을 위해 장학금을 내놨다.
지점장 교육동기 박양수씨는 “남 지점장 같은 평범한 사람이 이 사회를 떠받치고 있다는 믿음을 지니는 한, 얼마 전 우리는 크고 단단하고 반듯한 돌 하나를 잃었고, 그래서 우리 어깨가 한결 더 무거워졌다”고 말했다.
부인 윤씨는 “주중에는 일 때문에 새벽에 출근하고 밤늦게 돌아와서 잠도 충분히 못 자는데 주말에 다른 아빠들처럼 낮잠 자는 일이 없었다”며 “아프기 전 마지막으로 아이들과 함께 본 〈웰컴 투 동막골〉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사랑하는 남편을 떠나보내면서도 침착하기만 하던 윤씨가 큰아이가 한 이야기를 전하며 이내 눈물을 쏟아냈다. “장례를 치르고 며칠 지나서였어요. 애들 고모님 댁 다녀오는 차 안에서 동생이 잠들자 큰애가 울먹이며 저한테 그러는 거예요. ‘아빠 엄마는 왜 나한테 아빠가 아프다고 빨리 말하지 않았어요. 엄마 사람이 죽으면 다시 별로 태어났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하늘에서 아빠가 우릴 쳐다봤으면 좋겠어요’라구요. 이젠 아이들 데리고 가끔씩 밤하늘을 쳐다봐야 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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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사람면은 보통 사람 가운데 조금은 특이한 삶을 살다 간 분들의 이야기를 매주 토요일 싣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관심과 제보를 기다립니다.
*이 글은 1984~1987년 남씨와 군대생활을 같이하고 아이엔지생명에서는 직장 동료이기도 했던 독자 차재준(43·성남시 분당구 야탑동)씨가 보내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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