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8.03.23 19:14 수정 : 2008.03.23 19:14

고 정태영 선생 영전에

고 정태영 선생 영전에

진보당 조봉암사건 마지막 생존자
현대사 연구로 역사왜곡 바로잡고
혁신정당 헌신한 ‘영원한 젊은이’

평생을 진보적 정치운동에 바치고, 진보정당 연구로 금단의 영역을 개척해 왜곡된 현대사 인식을 바로잡는데 소중한 디딤돌을 놓은 선생께서 갑자기 돌아가시니 어찌 된 일입니까. 더구나 돌아가시기 며칠 전까지 소장학자들과 열정적으로 대화를 하던 선생께서 저 세상에 가셨다니 도무지 믿기지 않습니다.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하고 동양통신사에 들어간 직후인 26세때 혁신계의 거목 조봉암 선생을 만나 진보당에 입당했지만, 곧 이승만정권이 얽어맨 진보당사건으로 구속되고, 뿐만 아니라 선생이 쓴 강평서가 북한의 비밀지령문으로 둔갑해 대대적으로 보도되기까지 했지요. 그리고 선생이 3심에서 무죄를 받고 옥문을 나올 때 사형선고를 받은 조봉암 선생이 “나를 구출하는 명목으로 타협하지 말라”고 하면서 진보당을 재건하여 달라고 당부한 것은 평생토록 선생의 귓전을 쟁쟁 울렸습니다. 4·19가 나자 선생이 사회대중당, 통일사회당에서 활동하다 5·16쿠데타로 다시 영어의 몸이 된 것도 그 때문이었지요.

특히 선생께서 예순이 다 되어 집필한 <조봉암과 진보당> <한국사회민주주의정당사>는 오랫동안 금단의 영역으로 잊혀졌던 조봉암 선생과 혁신정당의 참모습을 알게 해주었고, 극단적인 반공이데올로기의 횡포로 불모지였던 현대사 연구에 새 이정표를 세워놓았습니다.

여운형 선생도 조봉암 선생도 항상 청년의 기백이 넘쳐흘렀지만, 선생께서 언제나 젊고 도전적인 패기로 진보정당에 대한 신조를 설파한 것은 후학들한테 신선한 자극이 되었습니다. 선생은 영원한 젊은이었습니다. 59세에 석사과정에 입학한 것도, 곧이어 박사학위를 마친 것도 젊은 기백이 없었다면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선생은 21세기에 들어와서도 조금도 쉼없이 소장학자들과 어울려 한국사회민주주의연구회를 조직해 상임대표를 맡았고, 스칸디나비아학회 등과 공동으로 학술토론회를 가져 듬직한 책으로 묶어내기도 했습니다. 선생은 현실 사회주의권이 붕괴될 때에도 조금도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보편적 민주주의에 기초한 사회민주주의를 실현시킬 기회가 온 것이라고 역설했습니다.

선생은 민주노동당의 중요 학술회의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면서 진보세력이 과거로부터 배우려 하지 않는다고 질타했습니다. 또 예나 지금이나 진보세력이 추상적이고 도덕적인 명분을 앞세우며 끊임없이 반목해온 사실을 비판하고, 가장 현실적인 대안을 추구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말씀하면서, 지금이야말로 사회민주주의정당의 역사를 진지하게 성찰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혁신정당운동의 산증인으로 4년전 민노당의 국회 입성을 그토록 기뻐하셨던 선생이 두 동강된 오늘의 민노당을 목도하며 눈을 감아야 했을 때 얼마나 가슴이 미어지고 쓰라렸을지 말씀을 안 하셔도 너무나 잘 알 것 같습니다.

혁신계 인사들이 똑같이 겪었던 일입니다만, 선생은 감옥을 드나들다 보니 가족들한테 미안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지요. 그리고 부인한테 내 대신 자식들을 잘 키워줘 고맙다는 얘기를 자주 하셨습니다.


죽을 때까지 청년처럼 살고 싶다고 말씀하셨던 선생께서 오늘도 젊은이들을 닥달하러 나오실 것만 같습니다. 진보적 정치운동의 선구자이자 현대사 연구의 개척자이고, 사회민주주의의 전도사였던 선생이시여, 편히 잠드십시오.

/ 서중석(성균관대 사학과)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