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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3.29 15:31 수정 : 2009.03.29 15:31

"국제그룹의 경우처럼 기업인이 각고의 노력을 통해 일군 기업군을 일거에 분해시켜 버린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경제정책가들은 그런 일을 다시는 해서는 안되고, 경제계도 다시 그렇게 당해서는 안된다"

고(故)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이 한 세미나에서 언급한 이 비운의 주인공, 양정모 전 국제그룹 회장이 결국 '그룹 재건'의 염원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1921년 부산에서 태어난 양정모 회장은 1947년 부친 양태진씨가 소유한 정미소 한 켠에 고무신 공장을 차리며 '국제 신발 신화'의 주춧돌을 놓았다. 1949년 부친이 국제화학주식회사로 회사 이름을 바꾸고 사장에 취임했지만, 실무 경영은 사실상 양 회장이 도맡아 1950년대 중반 무렵까지 100개가 넘는 생산라인을 갖춘 세계적 신발 공장으로 키워냈다.

1962년 국제 신발은 국내 최초로 미국 시장에 진출한 뒤 승승장구하며 당시 국시(國是)였던 '수출입국'을 선도했다. 1975년 종합상사로 지정된 뒤 이듬해 국제상사 회장직에 취임한 그는 공격적으로 중화학 업종까지 사업 영역을 확장했다.

1980년대 중반 당시 국제그룹은 모기업 국제상사를 비롯, 연합철강공업.국제종합기계.국제방직.조광무역.성창섬유.국제제지.국제종합건설.국제통운.동서증권 등 21개 계열사를 거느린 재계 서열 7위권의 막강한 기업집단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한 기업가가 수 십년동안 쌓아온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은 그야말로 한 순간이었다.

1985년 2월 당시 주거래은행이었던 제일은행은 자금난에 빠진 국제그룹의 정상화 대책을 발표한 뒤 곧바로 그룹 해체 작업에 들어갔다. 국제상사는 한일합섬에, 건설 부문은 극동건설에 매각되는 등 그룹은 1주일만에 '공중분해'됐다.

물론 무리한 기업 확장, 과도한 단기 자금 의존, 해외 공사 부실, 비효율적 친족 경영과 파벌 등의 내부 문제도 국제그룹 몰락의 원인으로 거론되고 있지만, 당시 5공화국 군사정부에 밉보여 '부실기업 정리', '산업 합리화'의 미명 아래 희생됐다는 분석이 거의 정설처럼 굳어진 상태다.

'국제그룹이 재계 7위임에도 마지못해 3개월짜리 어음으로 10억원을 헌금으로 상납했다', '폭설로 청와대 만찬에 늦게 참석했다', '1985년 2.12 총선에서 부산 지역 상공인 대표였던 양 회장의 협조가 부족했다' 등 국제와 최고권력층간 껄끄러운 관계를 뒷받침하는 소문들이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실제로 양 회장은 5공화국이 끝나 정권이 바뀌자 국제그룹 해체가 부당하다는 헌법소원을 제기했고, 1993년 7월 29일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8인의 다수의견으로 "정부의 공권력 행사가 기업활동 자유와 평등권을 침해했다"며 양 회장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양 회장이 흩어진 자신의 기업들을 되찾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그는 1994년 한일합섬을 상대로 제기한 주식인도청구소송에서 패소했다. 정부가 기업활동의 자유를 침해한 것은 사실이나, 이로 인해 개인간의 계약까지 무효가 될 수 없다는 논리였다.

더구나 외환위기를 거치며 신한종금.동서증권이 문을 닫고, 국제상사와 국제그룹 빌딩 등을 가져간 한일그룹 역시 해체 운명을 맞으면서, 그나마 실낱같이 남아있던 재기의 희망은 물거품이 됐다. 이후 양 회장은 뚜렷한 대외 활동없이 칩거에 들어갔다.

다만 양 회장의 형제들은 여전히 경영 일선에서 재계의 중추 역할을 맡고 있다. 화인케미컬 등의 지주회사인 KPX 양규모 회장, 대한전선 양귀애 명예회장이 모두 그의 동생이다.

신호경 기자 shk999@yna.co.kr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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