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3.29 18:21
수정 : 2009.03.29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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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모 전 국제그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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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모 전 국제그룹 회장 별세…전두환 정권에 미운털 ‘몰락’
양정모 전 국제그룹 회장(사진)이 29일 오후 별세했다. 향년 88.
양 전 회장은 폐렴 증상으로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왔다. 대표적인 자수성가형 기업인인 그는 국제그룹을 1980년대 중반 재계 서열 7위로까지 키워냈으나, 전두환 정권 아래서 그룹이 해체되면서 비운의 경영인으로 여생을 보냈다.
부산공업학교를 졸업한 그는 1949년 부친과 함께 부산에 국제고무공업사를 설립해 ‘왕자표 신발’을 생산하기 시작했고, 6·25 전쟁 때는 군수품 생산으로 큰 돈을 모았다. 1963년 신발업체 진양화학을 세워 눈부신 성장을 거듭했다. 이후 직물가공업체 성창섬유, 국제상선 등을 잇따라 창업했다. 1980년대 중반 국제그룹은 국제상사를 비롯해, 연합철강·국제종합기계·국제방직·조광무역·국제제지·국제종합건설·국제통운·동서증권 등 21개 계열사를 거느린 대규모 기업집단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그의 공든 탑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1985년 2월 주거래은행이던 옛 제일은행은 자금난에 빠진 국제그룹의 정상화 대책을 발표한 뒤 곧바로 그룹 해체작업에 들어갔다. 국제상사는 한일합섬, 건설부문은 극동건설에 매각되는 등 그룹은 1주일 만에 ‘공중분해’됐다.
국제그룹의 몰락에는 무분별한 기업 확장과 친족 경영 등의 내부적 요인도 작용했지만, 당시 전두환 정권에 밉보여 희생됐다는 분석이 재계에서는 나돌았다. ‘재계 7위임에도 마지못해 현금이 아닌 어음으로 10억원을 헌금으로 상납했다’ ‘청와대 만찬행사에 늦게 도착해 미운털이 박혔다’ 등의 소문들이 꼬리를 물었다.
양 전 회장은 국제그룹 해체가 부당하다는 헌법소원을 제기했고, 1993년 헌법재판소는 “정부의 공권력 행사가 기업활동 자유와 평등권을 침해했다”며 그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국제그룹을 회생시키기에는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그는 1994년 한일합섬을 상대로 제기한 주식인도청구소송에서 패소했다. 정부가 기업활동의 자유를 침해한 것은 사실이나, 이로 인해 개인간의 계약까지 무효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외환위기를 거치며 신한종금·동서증권이 문을 닫고, 국제상사와 국제그룹 빌딩 등을 가져간 한일그룹 역시 해체 운명을 맞으면서, 재기의 희망은 물거품이 됐다.
유족으로는 장남 양희원 ICC대표, 사위 권영수 엘지디스플레이 대표이사, 이현엽 충남대 교수, 왕정홍 감사원 행정지원실장 등이 있다. 빈소 서울아산병원 영안실 20호(02-3010-2631), 발인 4월1일 오전 9시, 장지 천안공원묘원. 이형섭 기자
sublee@hani.co.kr,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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