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01.28 18:53
수정 : 2011.01.28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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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7월 함께 중국기행에 나선 고 박완서(왼쪽)씨와 이이화(오른쪽)씨가 백두산 천지를 오르는 비탈길에서 찍은 기념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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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박완서 선생
사람은 살아가면서 많은 인연을 맺고 그 인연이 다시 동지관계로 이어진다. 나와 박완서 선생도 그런 끈끈한 관계를 30년이 넘게 이어왔다. 지난 주말 박 선생의 부음을 듣고, 팔순은 요즘으로 치면 ‘중늙은이’에 지나지 않는데 하늘은 왜 이토록 빨리 데리고 갔는지 홀로 탄식했다.
1979년 무렵, 내가 열고 있는 ‘한문서당’에 강의를 들으려고 오겠다는 박 선생의 연락을 받고 조금 주저했다. 자식 같은 젊은이들 속에서 함께 딱딱한 한문 공부를 할 수 있을지 조금 염려스러웠고 버텨낼지도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선생은 너무나 성실한 수강생이 되었다. 왜 한문을 배우려 하느냐고 묻자, 자신의 조상으로 <양반전>을 남긴 박지원을 다룬 소설을 쓰는 데 도움을 얻고 싶다고 했다. 우리집이 잠실 아파트로 옮겨가자 선생은 우연하게도 이웃 아파트로 이사를 왔고, 그 다음엔 구리 아치울에 앞서거니 뒷서거니 집을 마련해 가깝게 지냈다. 더욱이 마을공동체인 아치울마을친목회의 공동회장을 맡기도 했으니 이것만으로도 예사 인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선생은 아치울 서당에서도 강의에 거의 빠지지 않고 출석하는 모범생이었고 뒤풀이에도 끝까지 자리를 지키면서 대화를 나눴다. 그 분은 거의 젊은이들의 말을 듣기만 했지, 나서지 않았다. 술도 적당하게 마시고 시끄러운 분위기도 잘 참아냈다. 소박했으되 권위 의식이 전혀 없었다. 아치울에 시골마을에 살면서 그 흔한 자가용 대신 늘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다닌 걸 보아도 짐작될 것이다. 그런데 발표한 글을 읽어보면 그의 내면에 숨은 알찬 뭔가가 대화 속에 녹아내리고 있었다. 나를 모델로 한 것으로 보이는, 역사교수를 등장시킨 작품이 있는데 집안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는 꽁생원으로, 답사에만 열중하는 인물로 그리기도 했다. 또 개성 인삼 상인을 주제로 다룬 <미망기>에는 나에게 들은 얘기도 많이 참고했다. 내가 고발문학을 계속 써보시라고 당부를 하면 그저 웃기만 하던 그이셨다.
선생은 내가 관여하는 단체에 후원금을 내주기도 했다. 구리시에서 고구려역사문화보전회가 발족했을 때 이사의 이름을 걸고 꼬박꼬박 회비를 냈다. 또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지구촌의 굶주리고 헐벗은 아이들을 보살피며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에서는 그의 인간적 내면을 새삼 보았다. 하지만 결코 정치모임에는 나타나지 않았고 정치관련 단체에는 후원금 한푼 내지 않았다. 고집인지 신념인지 그랬다.
이제 선생은 떠났지만 그 체취는 아치울 자락의 골목길과 냇가와 꽃과 나무에 고스란히 베어있다. 그곳에 소박한 기념관 하나 세워 선생의 유향을 두고두고 맡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나마 누님같은 그의 그리운 정을 달래고 싶다. 이이화/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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